美138년 조선소가 택한 HD현대…‘배 아닌 생산체계’

산업 / 양지욱 / 2026-07-31 10:00:11
프레이저 27일 현지 발표·HD현대 30일 국내 공개…100에이커 부지 스마트 조선소 전환
▲ HD한국조선해양이 ‘프레이저 인더스트리와 ‘미국 조선산업 부흥을 위한 조선소 현대화 협력 관련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왼쪽부터 HD한국조선해양 김형관 대표, 프레이저 인더스트리 패트릭 켈리 대표 [HD현대 제공]

 

미국 위스콘신주에서 138년간 운영된 프레이저 조선소가 HD현대의 설계·자동화·인공지능(AI) 기술을 도입한다. 미국이 자국 조선업 재건에 속도를 내는 가운데 HD현대가 완성 선박을 넘어 선박을 만드는 생산체계까지 수출하는 사업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프레이저 인더스트리는 지난 27일 미국 현지에서 HD한국조선해양과 조선소 현대화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HD현대는 사흘 뒤인 30일 이를 국내에 공개했다.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협약식에는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과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도 참석했다. 민간 조선소 한 곳의 설비 개선을 넘어 한미 조선 협력사업의 하나로 추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 조선업 전문매체 워크보트(WorkBoat)는 프레이저가 보유한 슈피리어 사업장 100에이커 가운데 현재 사용하는 면적이 약 15에이커에 불과해 생산시설을 확대할 여지가 크다고 보도했다. 상시 고용 인원은 약 200명이지만 오대호 선박의 겨울철 수리 기간에는 약 600명까지 늘어난다. 프레이저는 2023년부터 2025년 사이 선박 인도량을 두 배로 늘렸으며 2026년과 2027년에도 다시 두 배 확대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패트릭 켈리 프레이저 인더스트리 최고경영자(CEO)는 "워크보트에 미국 조선업이 한국 조선사로부터 배울 점이 많다"며 "기존 기술을 단계적으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최신 생산기술로 곧바로 도약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현지 조선소가 HD현대를 선택한 배경이 단순한 설비 공급보다 생산성 격차 해소에 있다는 의미다.

협약에 따라 HD한국조선해양은 슈피리어호 연안의 프레이저 조선소를 진단한 뒤 야드와 공장 배치를 다시 설계한다. 로봇·자동화 설비와 AI·데이터 기반 공정관리 시스템도 적용한다. 비용과 공정, 품질, 생산성 개선뿐 아니라 공급망 확대와 기술인력 양성까지 협력 범위에 포함됐다.

양사는 올해 안에 ‘조선소 현대화 컨설팅 프로그램’ 공급계약을 체결할 계획이다. 프레이저 조선소를 미국 조선산업 재건을 위한 실증 모델로 만든 뒤 다른 현지 조선소로 적용 범위를 넓힌다는 구상이다.

이번 사업은 HD한국조선해양이 지난 3월 정관에 ‘디지털 엔지니어링·매뉴팩처링 플랫폼 개발 및 공급업’을 추가한 이후 실제 프로젝트로 연결한 첫 사례다. 조선소 설계와 건설, 생산·운영 시스템, 데이터 관리기법을 하나의 패키지로 공급하는 ‘조선소 건설 종합 솔루션’이 독립적인 사업으로 출발한 것이다.

미국 조선산업의 현실도 HD현대에는 기회다. 미국 정부가 지난 2월 발표한 해양산업 재건계획에 따르면 미국 조선소는 모두 66곳이지만 실제 선박을 활발히 건조하는 조선소는 8곳에 그친다. 미국 정부는 낡은 시설과 낮은 생산능력을 개선하기 위해 조선소 현대화와 자동화, 동맹국 투자, 공급망 복원과 인력 양성을 주요 과제로 제시했다.

미국의 보호주의도 이번 사업에는 진입장벽보다 수요 요인으로 작용한다. 존스법은 미국 내 항구 사이에서 화물을 운송하는 선박에 미국 건조·미국 소유 등의 요건을 적용한다. 한국에서 건조한 선박을 미국 연안운송 시장에 직접 판매하기는 어렵지만, 한국의 기술을 적용한 미국 조선소에서 선박을 생산하는 방식은 미국의 현지 건조 원칙과 양립할 수 있다.

HD현대의 미국 진출 방식은 현지 조선소를 직접 인수하는 방식과도 다르다. 한화그룹이 필리조선소를 인수해 미국 내 생산거점을 직접 확보했다면 HD현대는 기존 조선소에 설계와 자동화, 디지털 플랫폼을 공급하는 방식이다. 대규모 인수자금을 투입하지 않고도 여러 조선소에 같은 솔루션을 반복해 공급할 수 있는 플랫폼형 사업에 가깝다.

기술 수출을 뒷받침할 실적도 쌓이고 있다. HD한국조선해양은 지난 29일 발표한 올해 2분기 잠정실적에서 매출 8조9270억원, 영업이익 1조6451억원을 기록했다. 전년 동기보다 각각 20.2%, 72.5% 증가한 분기 기준 최대 실적이다. 회사는 생산성 향상과 고선가 선박 비중 확대를 수익성 개선의 주요 배경으로 제시했다. 국내 조선소에서 이익으로 검증한 생산방식을 미국에 판매하는 단계로 넘어가는 셈이다.

아직 MOU 단계인 만큼 실제 계약금액과 자동화 설비 공급 범위는 정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프레이저 조선소에서 공기 단축과 건조량 확대, 원가 절감 효과가 수치로 확인되면 HD현대는 미국 내 다른 상선·함정·수리조선소로 사업을 확장할 수 있다.

미국 조선업 재건은 한국 조선사에 경쟁자를 키우는 사업만은 아니다. 미국이 현지에서 더 많은 배를 만들려 할수록 조선소를 설계하고 효율적으로 운영할 기술 수요도 커진다. 프레이저 프로젝트는 HD현대가 세계 최대 선박 건조회사에서 세계 조선소의 생산체계를 공급하는 회사로 사업 영역을 넓히는 첫 시험대다.

 

토요경제 / 양지욱 기자 yjw@sateconomy.co.kr 

 

[ⓒ 토요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양지욱
양지욱 안녕하세요. '토요경제' 양지욱 입니다.
기자 페이지
뉴스댓글 >

    많이 본 기사

    1
    한화투자증권, RWA 담보 활용으로 사업 확대…체인링크와 가치검증 체계 구축

    한화투자증권, RWA 담보 활용으로 사업 확대…체인링크와 가치검증 체계 구축

    한화투자증권이 실물연계자산(RWA)의 토큰화 사업을 글로벌 유통과 담보 활용으로 확대한다. 단순히 자산을 디지털 증권으로 발행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가치 검증과 블록체인 간 연결을 통해 금융상품의 활용 범위를 넓히겠다는 구상이다.30일 한화투자증권(대표 장병호)에 따르면 회사는 블록체인 데이터 인프라 기업 체인링크(Chainlink)와 글로벌 디지털자산 플랫

    2
    네이버, 엔비디아 10억달러 투자 납입일 확정…AI 팩토리 자금조달 본궤도

    네이버, 엔비디아 10억달러 투자 납입일 확정…AI 팩토리 자금조달 본궤도

    네이버가 엔비디아의 전략적 투자 일정과 절차를 확정했다. 인공지능(AI) 인프라 확보라는 선결 조건을 충족하면서 대규모 AI 팩토리 사업에 필요한 자본 조달이 구체화됐다.네이버(대표 최수연)는 30일 엔비디아를 대상으로 한 제3자배정 유상증자의 납입일을 기존 10월 30일에서 11월 6일로 변경했다고 공시했다. 신주 상장 예정일도 11월 20일에서 27일로

    3
    금융위, 부실 금융사 정리 150일→3~4일 단축 추진…보험사도 적용

    금융위, 부실 금융사 정리 150일→3~4일 단축 추진…보험사도 적용

    금융위원회가 금융시장 전반으로 부실이 확산할 우려가 있는 금융회사를 신속하게 정리하는 제도 도입을 추진한다. 보험사도 적용 대상에 포함되며, 긴급 상황에서는 주주총회와 입찰 등 기존 절차를 생략할 수 있도록 한다.금융위원회는 29일 '금융회사 신속정리제도 도입방안'을 발표하고 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과 예금자보호법 개정을 추진한다고 밝

    4
    GC녹십자, 헌터증후군 치료제 국내 허가…혈액제제 사업에 1700억 대출 승인

    GC녹십자, 헌터증후군 치료제 국내 허가…혈액제제 사업에 1700억 대출 승인

    GC녹십자가 중추신경계 증상을 동반한 헌터증후군 치료제의 국내 품목허가를 획득했다. 이와 별도로 추진하는 차세대 혈액제제 개발·생산 사업에는 국민성장펀드를 통한 1700억원의 대출 지원이 승인됐다.30일 GC녹십자(대표 허은철)에 따르면 식품의약품안전처는 뇌실투여형 헌터증후군 치료제 '헌터라제아이씨브이주(Hunterase ICV)'의 국내 품

    5
    현대차·기아, 英 유로7 신차 조기 의무화 철회…EU 인증도 인정

    단독 현대차·기아, 英 유로7 신차 조기 의무화 철회…EU 인증도 인정

    영국 정부가 자동차 배출가스 규제인 유로7(Euro 7)을 도입하면서 신규 차종에 대한 조기 의무화는 철회하고 유럽연합(EU)의 형식승인을 인정하기로 한 사실이 토요경제 취재로 확인됐다. 이에 따라 현대자동차와 기아 등 국내 완성차업체의 영국 시장 인증 부담이 완화될 전망이다.28일 토요경제가 영국 교통부(Department for Transport)가 전

    S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