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가 먼저야? 자존심이 먼저야?

산업1 / 이완재 / 2013-06-14 18:04:40
‘격’(格) 따지다 회담파행 또다시 ‘첩첩산중’

▲ 실무접촉일인 지난 9일 오전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우리측 수석대표인 천해성 통일부 통일정책실장과 북측 수석대표인 김성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 부장(왼쪽)이 회담에 앞서 악수를 하고 있다.


[토요경제=이완재 기자] 수석대표의 ‘급’을 놓고 자존심싸움 끝에 결국 갈길 먼 남북관계가 파행으로 치달았다. 이번 회담 무산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대북정책 구상인 ‘한반도 프로세스’도 상당한 타격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 11일 기대를 모았던 남북 장관급회담 성사를 위한 남북당국자 회담은 성사 직전까지 분위기를 끌어가다, 엉뚱하게도 장관급 회담자의 ‘급’을 놓고 남북간 대립하다 무산되고 말았다.

예정된 회담을 하루 앞두고, 북측은 대표단 명단을 맞교환하면서 남측이 제시한 수석대표(김남식 통일부 차관)에 강한 불만을 제기하며 대표단 파견을 ‘보류’한다고 통보했다. 결국 수석대표급의 ‘격(格)’에 따른 북한의 반발로 회담이 무산되고 만 것. 이 과정에서 청와대가 북한을 강하게 압박하는 모양새가 연출되면서 야당을 비롯한 일각에서는 박 대통령의 원칙론이 오히려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 발목을 잡은 것 아니냐는 비판론까지 제기되고 있다. 남북관계의 진전을 위해서는 일단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는 게 우선인데, 불필요한 대화의 형식에서부터 너무 원칙만 고집하다 남북관계의 파행을 자초했다는 비난에 직면한 것이다. 이번 회담무산과 관련, 북한은 “우리는 털끝만한 미련도 가지지 않는다”며 남북관계에 미칠 영향에 대해 남한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고 공세를 펼치고 있다.

국내 정치권의 반응도 현 정부에 우호적이지 않다. 당장 민주당을 비롯한 야권에서는 “소모적인 기싸움으로 한반도 평화구축이라는 본질을 놓쳐버렸다”며 박근혜 정권을 강하게 성토하고 있다. 당장 북 핵문제, 이산가족 문제, 개성공단 정상화 등 경협문제등 산적한 과제로 가야할 길이 먼 남북관계는 또다시 기약 없는 시험대에 놓이게 됐다. 여기에 박근혜식 대북접근법으로 강경일변도 전략을 고수하고 있는 현 정부의 대북전략도 평화기조를 위해서는 제고해볼 여지가 있다는 목소리도 터져나오고 있다.


◆北 “남북회담 무산 미련없어, 南 책임”
북한은 지난 13일 남북당국회담이 무산된 것에 대해 “우리는 털끝만한 미련도 가지지 않는다”며 남북관계에 미칠 영향에 대해 남한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의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는 이날 대변인 담화를 통해 “북남당국 회담이 괴뢰패당의 오만무례한 방해와 고의적인 파탄책동으로 시작도 못해보고 무산되고 말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남조선기업가들을 비롯한 각계층을 죽음과 비탄속에 몰아넣은 죄행에서 결코 벗어날수 없으며 이번 사태가 북남관계에 미칠 엄중한 후과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평통 대변인은 “남측이 처음부터 장관급회담을 주장하고 실지로 통일부 장관을 내보낼 의향이라고 몇번이고 확약했음에도 불구하고 회담이 개최되기 직전에 수석대표를 아래급으로 바꾸어 내놓는 놀음을 벌린 것은 북남 대화역사에 일찌기 있어본 적이 없는 해괴한 망동으로서 무례무도의 극치”라고 비난했다.

이어 “우리는 판문점연락통로를 이용해 남측이 부당한 입장을 철회하고 우리와 같은 장관급 수석대표가 나오도록 할 것을 거듭 요구했으나 남북문제를 협의해결할 수 있는 당국자는 통일부 차관이라고 강변하면서 저들의 부당한 주장을 끝까지 고집했다”고 맹비난했다.

대변인은 “우리의 당중앙위원회 비서가 한갖 괴뢰행정부처 장관 따위와 대상도 되지 않는다는것은 세상이 다 인정하고 있는바”라며 “북남대화력사가 수십년을 헤아리지만 지금까지 우리측에서는 당중앙위원회 비서가 공식 당국대화마당에 단장으로 나간적은 한번도 없다”고 주장했다. 대변인은 “이 모든 것은 남측이 애당초 대화 의지가 없을 뿐 아니라 북남당국회담에 마지못해 끌려나와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나 회담에 장애를 조성하면서 지연시키고 파탄시키려는 생각밖에 없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정부 “北 실무접촉 왜곡공개 유감, 대화 문 열려있어”
정부는 13일 북한이 남북당국회담 무산을 우리 정부의 책임으로 돌리고 실무접촉 과정을 일방적으로 공개한 데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비판했다.

통일부는 이날 “북한이 수석대표 급(級) 문제를 이유로 남북당국회담을 무산시키고 오늘 담화를 통해 실무접촉 과정을 일방적으로 왜곡해 공개한 것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어 “수석대표 급을 맞추는 것은 남북간 현안에 대한 실질적 협의를 통해 새로운 남북관계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것”이라면서 “대화 상대방에 대한 존중의 표시이자 신뢰형성의 기초”라고 강조했다.

통일부는 “북한이 과거 남북회담 관행을 운운하고 있으나 과거 관행을 일반 상식과 국제적 기준에 맞게 정상화시켜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정부는 북한에 대화의 문을 열어두고 있으며 북한이 성의를 갖고 책임있게 남북 당국 대화에 호응해 오길 바란다”고 밝혔다.

◆민주, 남북당국회담 무산 공세 강화…“차라리 정상회담해라”
민주당은 13일 남북당국회담 무산과 관련, 청와대와 정부를 겨냥한 공세를 한층 강화했다.

남북 양측의 책임을 묻는 이른바 ‘양비론’을 비판한 정부에는 보도지침이자 색깔론이라며 불편한 심경을 숨기지 않았다. 차라리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김한길 대표는 이날 오전 국회에서 의원총회를 열고 “정부는 굴종이나 굴욕은 안 된다면서 국민의 자존심을 자극하고 있다. 마치 이제까지 남북관계는 굴종이었다는 듯 말한다면 이런 식의 접근이야말로 국민의 자존심에 상처를 낼 수 있다. 정부는 대화 없이 평화 없다는 진리를 잊지 말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병헌 원내대표도 “북한의 떼쓰기가 좋아 보이지 않음을 알지만 양비론은 북한에 면죄부를 주는 식이라는 청와대의 발언은 사실상의 신보도지침이다. 박근혜정부는 오만하고 독선적인 행태를 중단하라”고 발언했다.

심재권 의원도 “(협상상 문제에 대한)정당의 지적을 면죄부를 주는 행위로 규정하는 것은 신 보도지침 수준이 아닌 신 매카시즘이자 신 색깔론이다. 청와대는 무오류의 교황이고 추종해야 할 존재냐. 오만불손한 태도”라고 비난 강도를 높였다.

이석현 의원도 “청와대에서 양비론은 면죄부라고 하는데 보안법 시대와 국보법 시대에도 그런 말은 못한다. 면죄부인지 아닌지는 국민이 정하는 것”이라고 지적한 뒤 “굳이 김양건을 오라면서 급과 격을 따져야 했냐. 급과 격을 따지다 급격히 파탄 나고 말았다”고 정부의 방식을 지적했다.

이 의원은 또 “2000년에 6·15정상회담을 열었던 김대중 대통령 같은 열정으로 해야 길이 열린다. 박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만나서 털어놓고 얘기해야 한다”며 “만남 자체만으로 남북의 새 시대를 여는 데 큰 기여가 될 것이다. 차제에 정상회담으로 전환하는 게 옳다”고 제안했다.


◆ 살얼음 속 남북대치 앞으로 어떻게 전개되나?
그러나 박 대통령이 자신의 원칙론에 입각한 대북 기조에 변화를 주지는 않을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이같은 전망에는 박 대통령의 생각은 남북간 격이 맞지 않는 과거 회담의 관행은 ‘국제적 스탠더드’ 뿐만 아니라 상식에도 어긋나기 때문에 바로잡아야만 한다는 게 청와대의 설명에서도 읽을 수 있다. 박근혜 식 강경모드는 ‘박근혜 스타일의 대북접근법’을 북에 각인시키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결국 대화가 급한 쪽은 북한이라는 전제 하에 남북 국면에서 주도권을 쥐겠다는 현 정부의 의도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같은 현 정부의 대북전략이 이번 회담무산으로 감정이 손상 될대로 손상된 북에게 어느 정도 먹힐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또 일각에서는 남북당국회담이 수석대표의 ‘급(級)과 격(格)’ 문제로 무산되자 국내에서 야당을 중심으로 북한도 잘못했지만 우리 정부도 잘못했다는 양비론(兩非論)이 제기되고 있는데 대한 비판의 시각도 만만치 않다. 그 같은 시각의 배경에는 북한 당국이 격식 문제로 남북대화를 무산시키며 노렸던 것이 남한 내부의 분열에 있다는 논리도 존재한다.

결국 이번 남북 회담의 실패를 놓고 비효율적인 갑론을박하기보다는 남북평화를 위한 현실적인 대책 마련이 더 절실하다는 교훈도 함께 남게 됐다. 무엇보다 남북 양측의 자존심을 내건 치열한 신경전이 계속되는 한 지금과 같은 대화단절 국면은 한동안 불가피할 것이라는 것이 지배적인 관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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