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칼럼]지는 꽃은 희망을 남긴다

오피니언 / 정해용 / 2009-08-24 14:24:13

계절이 무성하다. 어김없이 들에는 꽃이 피고 숲마다 푸른 잎은 우거졌다. 천지자연이 개벽을 이루어 뽕밭이 바다가 되기 전에는 이 법칙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


인간사도 다를 바 없다. 회자정리. 세월의 법칙 앞에서 지지 않는 꽃은 없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85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8월18일 오후 1시. 폐렴의 악화에 따른 폐색전증이라는 설명이 있지만, 쉽게 말하면 노환으로 인한 자연사다.


그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는 우리나라의 현대사와 궤를 같이 한다. 이 나라 민주주의가 질곡에 빠졌을 때 그 또한 죽음의 골짜기를 걸었고, 이 나라에서 비로소 민주주의가 꽃 피기 시작했을 때 그의 일상도 화사한 꽃을 피웠다. 이 나라의 평범한 시민들이 말과 행동의 자유를 빼앗겼을 때 그 또한 입에 재갈을 물고 손발에 족쇄를 차야 했으며, 시민들이 국운 상승의 즐거움을 노래할 때 그 또한 자기 인생의 절정기를 맞았다. 많은 시민들이 그의 죽음을 각별하게 받아들이는 이유다.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


21일 공개된 김 전 대통령의 올해 1월7일치 일기장에 쓰여 있는 문구다. 풍운의 일대기를 남기고 가는 한 거인의 말이어서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그의 생이 숱한 고난과 역경으로 점철되어 있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젊은 시절에는 경쟁과 투쟁의 과정에서 모진 고문과 감시와 죽음의 위협을 견뎌야 했고, 대통령이 된 뒤에도 더러운 마타도어와 조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가 유신정권의 위협을 피해 건너갔던 일본에서 한국 정보기관에 의해 납치되어 바다에 수장될 뻔한 위기를 넘겼을 때, 그의 부친은 그 충격으로 쓰러진 뒤 곧 별세했다고 한다. 그는 부친의 장례식마저 자유롭게 참석하지 못했다. 큰아들을 대신 보냈지만, 이번에는 아들이 석연찮은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쳐 평생의 장애를 얻었다. 그것은 공교롭게도 일찍이 그 자신이 당했던 사고와 똑같은 것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민주화를 얻어내고 그 자신이 대통령이 된 뒤에도, 그에게는 조악한 루머들이 따라다녔다. 그 대부분은 악의에 찬 모함들이었다. 남북간 직접대화와 화해협력의 길을 열어 전 세계가 그 성취를 칭찬하는데도 국내에선 그조차 헐뜯는 사람들이 많았다. 뿐인가. 그를 뿌리로 삼아 이어진 다음 정권과는 보이지 않는 갈등의 골이 형성됐고, 그가 애써 이룬 민주주의와 민족화해의 토대는 아직도 종종 부정되고 있다. 현직 대통령이 추모하고 국무회의가 의결한 國葬을 두고도 그럴 자격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소리가 사라지지 않는다.


그가 서거하기 몇 달 전, 그의 정권 계승자이며 정신적 후계자인 노무현 전 대통령은 새 정권의 ‘소탕작전’에 버금가는 ‘비리수사’에 시달리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내 몸의 반쪽이 무너져 내린 듯하다”고 김 전 대통령은 통곡해야 했다. 두 차례나 정상회담을 가진 남북 사이에는 어쩌면 일촉즉발의 위험마저 느껴지는 긴장이 재현되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그가 그토록 염원하고 몸 바쳐 이루고자 했던 민주주의와 민족화해의 성취는 아직 위태로운 긴장의 바다를 다 건너지 못한 듯하다.


그래도 인생이 아름답다고?


생각해 보면 그가 남긴 말의 핵심은 ‘역사는 발전한다’는 대목에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혹한이 지나가고 봄이 오더라도, 그 봄날이 어느 날부터 갑자기 시작되는 것은 아니라는 자연의 법칙을 떠올리게 된다. 날이 풀려 겨울가지에 움이 트고 얼었던 연못에서 물고기들이 움직이더라도 어느 밤에는 갑자기 꽃샘추위가 닥쳐와 겨울이 되돌아올 것 같은 착각에 움츠러들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오던 봄이 되돌아간 적이 있었던가. 봄과 겨울은 엎치락뒤치락 힘겨루기를 하는 것 같지마는 결국 계절은 봄으로 넘어가고, 봄인가 하면 곧 여름으로 넘어가게 마련이다. 인생이 아름다운 것은 시계바늘 같은 역사가 결국은 앞으로 돌아가고 말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피는 꽃은 반드시 지고, 떨어진 꽃은 반드시 씨앗을 남긴다. 모두를 열광케 하던 봄과 여름의 꽃이 지고 말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슬프지만은 않은 까닭이다. 인동초 같은 불굴의 삶을 통하여 이러한 天理를 생생히 보여주고 간 김대중 전 대통령은 행복한 사람이며, 그런 삶을 지켜볼 수 있었던 우리 국민들 또한 행복한 사람들이다. 가신님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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