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는 물보다 진해서일까. 우리나라 기업들에서는 유독 가족경영이 두드러진다.
최근 전문경영인(CEO) 체제가 확산되고 있음에도 한국의 기업승계는 오너 일가의 혈연 중심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빈번하다.
물론 스웨덴의 발렌베리 가문이나 일본의 도요타, 이탈리아의 루이뷔통과 베네통의 예처럼 가족경영과 혈연에 의한 기업승계가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국지적 현상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 재계사에서 가족끼리 이뤄지는 경영권 승계는 TV드라마의 단골소재로 사용될 만큼 보편적이며 현재진행형이다.
이에 따라 기업의 소유와 경영을 오너 일가가 장악하는 재벌 중심체제에 대해 사회적 시선이 곱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같은 현상은 국내 기업의 역사가 짧은 데서 기인한다.
일본만 해도 100년 이상 된 장수기업이 2만 개가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비해 산업화가 늦은 우리나라의 경우 100년 이상 된 장수기업은 두산과 동화약품 정도이며 창업 90년을 맞은 경방그룹 정도를 장수기업으로 손꼽을 만하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창업 1세대가 경영 일선에 있거나 2세와 공동경영에 나서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또 혈연을 중시하는 유교의 영향이 더해지면서 소유와 경영을 모두 자손에게 물려주는 관행이 재계에 자리 잡은 것으로 분석된다.
그동안 경영권 승계의 가장 보편적인 형태는 부자간 세습이었다. 삼성과 현대가 그랬으며 대부분의 대기업들이 아버지가 아들에게 경영권을 대물림했다.
이 과정에서 과거 현대그룹의 ‘왕자의 난’처럼 형제간의 갈등이 간혹 불거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삼성의 경우처럼 경영권의 부자세습은 여전히 일반적인 모습이다.
올해는 유독 ‘형제경영’에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여기저기서 형제경영 체제의 시동음 혹은 마찰음이 들린다.
두산은 3월27일 이사회를 통해 박용현 회장을 의장 겸 대표이사 회장으로 선임하면서 새로운 형제경영 체제의 출범을 알렸다. 박용현 회장은 고 박두병 초대 회장의 4남이다.
장남인 박용곤 현 명예회장부터 시작된 두산의 형제경영 전통은 차남인 박용오 성지건설 회장과 삼남 박용성 회장으로 이어졌다가 박용성 회장이 중앙대학교 이사장과 대한체육회장을 겸임하는 등 대외활동 쪽에 무게를 두면서 박용현 회장에까지 이르게 됐다.
SK그룹은 최근 최재원 SK E&S 부회장이 지주사인 SK와 핵심 계열사들의 임원으로 가세하면서 새로운 형제경영 체제의 시동을 걸었다.
특히 1월 스위스 다보스 포럼과 4월 중국 보아오포럼에 최태원 회장과 최 부회장이 동행하면서 형제경영 체제를 더욱 돈독히 할 것으로 비쳐졌다.
3형제가 차례로 경영을 이어온 금호아시아나그룹은 형제경영의 모범 사례로 꼽히다가 최근 이상징후가 포착되면서 마찰음을 내고 있는 케이스다.
1984년 창업주인 고 박인천 회장이 타계하면서 장남인 고 박성용 명예회장이 그룹을 물려받았다가 1996년 차남 고 박정구 회장에게 경영권이 승계됐다.
이후 2002년 박정구 회장의 타계를 계기로 3남인 박삼구 회장이 4대 회장에 취임했지만 최근 4남 박찬구 회장이 지주회사격인 금호석유화학의 주식을 사들이면서 형제갈등이 시작된 것 아니냐는 해석을 낳고 있다.
형제경영의 장점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가족회사의 특성상 신속한 의사결정에서 나오는 막강한 추진력을 꼽는다.
소유와 경영이 형제들에게 몰려 있어 계열사 간의 이견 조정에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전문경영인 체제에서는 사업 추진을 위해 계열사 간 협력이 필요할 경우 일일이 의견조율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며 “그러나 형제끼리 계열사를 나눠가진 그룹은 의기투합이 쉬워 사업수행의 추진력이 생긴다”고 설명했다.
또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일관된 방향으로 기업을 이끌어 나갈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전문경영인 체제는 기업이 단기적인 성과에 치중하게 될 우려가 있다. 경영인이 기업의 주인이 아니라 피고용인의 처지에 있기 때문에 가시적 성과에 집착할 가능성이 높다.
이에 반해 형제경영은 가족회사라는 특징 덕분에 장기적 관점에서 경영이 가능하고 대표경영자의 교체에 따른 조직문화나 비전의 변화 가능성이 적다.
전문가들은 이와 같은 형제경영의 장점이 발휘된 사례로 중공업 위주의 포트폴리오 개편에 성공한 두산그룹을 지목하고 있다.
형제경영뿐 아니라 재벌체제 자체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으나 자질이 부족한 형제가 기업경영을 맡는 것은 기업에게는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다.
최근에는 오너 일가에서 전문경영자 못지않은 능력을 지닌 경영자들을 많이 배출하고 있는 추세다. 그렇지만 능력이 모자란 선장을 둔 기업은 언제든지 난파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반드시 염두에 두라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또 형제간의 갈등이나 반목에 자칫 기업이 쪼개질 수 있다는 점도 형제경영의 단점이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아이들은 출생 순서에 따라 부모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형제들과 경쟁하는 과정에서 성품이나 스타일이 형성된다.
이를 통해 맏이는 개인보다 전체를 중시하고 리더십을 획득하는 한편, 다소 보수적이거나 독선적인 성향을 보이기도 한다. 반면 차남이나 막내는 조정과 화해에 능하며 자기만의 색깔을 추구하는 성향이 강하지만 때로는 무모한 도전이나 모험을 즐기기도 한다.
이 같은 형제들의 성격이 잘 맞물리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형제간의 분열로 치달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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