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할놀이가 끝나고, 무대 위에는 허무만이"

문화·라이프 / 전성운 / 2012-07-11 16:45:31
[연극] 더 러버(The Lover)


현대 삶의 문제들은 무질서하고 부조리하다고 전제하는 ‘부조리극’은 전통 연극기법인 사실주의 대신 비연극적인 것들을 나열하는 반연극 기법을 차용한다. 등장인물의 자기 동일성, 시·공간의 현실성, 언어가 전달능력을 상실한다. 연극이 스스로 극 속 행위의 의미를 해체하는 것이다.


‘연극열전4’의 세 번째 작품인 ‘더 러버(The Lover)’는 이 부조리함을 현대 부부의 영역 안으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부조리극의 대가’로 통하는 노벨 문학상 수상 영국 작가 해럴드 핀터(1930~2008)의 대표작인 만큼 부조리가 예리하다.


여름, 런던 근처 평범한 가정. 아내 ‘사라’는 집안을 정리하고, 남편 ‘리처드’는 출근을 준비한다. 아내의 볼에 키스하며 “당신 애인, 오늘 오나?”라고 묻자 사라는 “오후 세시에 온다”고 담담하게 답한다.


이 놀라운 상황은 실제 설정이다. 사라와 리처드가 부부 권태를 극복하기 위해 역할 놀이를 하는 것이다. 오후에 리처드는 마초, 사라는 짧은 드레스와 굽이 높은 구두를 신은 요부로 변신한다.


남자가 봉고를 두드리고 여자는 그 리듬에 맞춰 춤을 추며 정열을 발산한다. 또 남자가 여자를 강제 추행하려는 상황, 여자가 남자를 유혹하는 상황 등을 연출하며 부부는 격렬한 섹스를 끝낸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행위에도 권태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 이를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부부 관계에 분노하며 부유하는 언어만 남발한다. 리처드는 역할 놀이를 끝내자고, 사라는 역할 놀이를 계속하자고 발악하지만 남녀 모두 위기를 돌파하고자 하는 마음은 마찬가지다.


발악 이후 말과 말 사이의 생략, 즉 상대방의 대답을 기다리며 생기는 침묵을 가리키는 ‘핀터레스크(Pinteresque)’가 찾아오며 긴장감을 유발한다. 그 다음 무대 위에 감도는 것은 허무함뿐이다.


극의 마지막, 사라와 리처드는 서로를 바라본다. 인물들의 변화되는 심리를 따라 360도 회전하는 사각 턴테이블 무대 위에 공연 내내 떠 있던 집의 형틀이 그제야 생각난 듯 밑으로 내려와 집 무대에 맞춰진다.


이 부부는 가정 안에 안착한 것인가, 갇힌 것인가. 긍정도 부정도 아닌 열린 결말이 오히려 답답함을 안기며 부부 문제에 대해 다시 고민케 한다.


70분 러닝타임 중 약 2분가량 등장하는 우유 배달부는 극에 ‘핀터스러움’의 방점을 찍는다. 집으로 뜬금없이 찾아온 이 우유배달부는 핀터 부조리극의 또 다른 상징이다. 그는 맥락에 맞지 않는 말만 남발하나 잠깐 사이에 사라가 가진 욕망을 끄집어낸다. 사라가 새로 나온 크림을 과감하게 손가락으로 찍어 빨아 먹는 장면이 그렇다.


전라의 남자가 전라의 여자의 가슴을 부여잡고 있는 자극적인 포스터와 전라로 무대 위에 오르는 배우들 등으로 무척 선정적이라는 생각도 들 법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주연 배우들의 누드는 그들의 내면까지 철저하게 까발리는 것으로 오히려 고독감을 전한다.


1963년 9월 영국 런던 아츠시어터에서 핀터의 연출로 초연한 이 연극은 1974년 ‘티타임의 정사’라는 이름으로 국내에 처음 소개됐다. 이후 극단 실험극장과 극단 민중극장의 레퍼토리로 여러 차례 공연했다.


당시 연극의 에로티시즘이 이슈가 되자 자극적인 포르노그래피로 접근한 아류작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이로 인해 작품의 본질적 의미가 퇴색되기도 했다.


연극배우 겸 탤런트 송영창(54)이 리처드를 연기한다. 독일에 거주하며 현지에서 배우로 활동하는 이승비(36)가 잠시 귀국, 사라를 맡았다. 두 배우는 전라 노출을 불사하며 부부들의 권태와 욕망을 온몸으로 구현한다.


‘갈매기’·‘레드’ 등 감각적 해석으로 주목 받고 있는 연출 오경택씨와 뮤지컬 ‘캐치 미 이프 유 캔’, 연극 ‘됴화만발’ 등에서 세련되고 상징적인 무대를 선보인 무대디자이너 정승호씨가 뭉쳤다. 8월13일까지 서초동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공연한다. 입장권은 3만~4만원, 문의 02-766-6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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