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의 ‘유탄’이 껄끄러운 중소기업

오피니언 / 이정선 / 2018-06-01 11:04:54

오래 전, 중소 무역업체인 D사가 있었다. 섬유제품을 수출하는 작은 무역회사였다. D사는 자체 공장도 없이 수도권 지역의 임대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 수출하고 있었다.

규모는 작았지만 직원들은 “우리도 대기업 한 번 해보자”며 열심히 뛰고 있었다. 그런 결과, 대규모 수출신용장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문제가 있었다. 물량이 큰 대신, 수출 단가가 빠듯했다. 바이어가 요즘 용어로 ‘단가 후려치기’를 한 것이다. 자칫하면 손해가 날 수 있을 장사였다.

신용장에는 ‘취소불능(irrevocable)’이라는 조건이 붙는다. 그래서 ‘취소불능 신용장’이다. 바이어와의 원만한 거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모처럼의 ‘큰 수출’을 잡아야 했다.

D사는 궁여지책으로 원·부자재 납품업체들에게 납품단가를 좀 인하해 달라고 요구했다. 단가를 낮춰도 물량이 많으니까 수지를 그럭저럭 맞출 수 있을 것이라며 설득했다.

원·부자재 납품업체들은 D사와 오랫동안 거래한 ‘단골 거래선’이었다. 그 중에는 규모가 D사보다 큰 납품업체도 있었다.

납품업체들은 모처럼의 요구를 물리치기 힘들었다. D사는 납품업체들의 도움으로 어렵게 원·부자재를 확보해서 수출을 이행할 수 있었다. 중소기업이면서도 이렇게 납품업체들과 ‘상생’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어렵게 생겼다. 지난주 정부가 당정협의를 거쳐 발표한 ‘대·중소기업 간 견고한 신뢰기반의 상생협력 생태계 구축 방안’이 그렇다.

당정이 ‘납품단가조사 태스크포스’라는 것을 만들어 부당한 대금 결정이나 감액 행위 등 납품단가와 관련된 애로를 해소하기 위해 수시로 기획조사를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상생법’ 상 위법행위 유형에 부당한 원가정보 요구행위를 추가하고, 한 번이라도 부당하게 납품단가를 인하할 경우 공공분야 입찰참여 제한하는 ‘원스트라이크 아웃제’도 도입하겠다고 했다. 자칫하면 ‘부당한 갑질’로 몰릴 참이다.

물론 대기업들이 잘하라고 마련하는 조치일 것이다. 지난 2013년 이른바 ‘경제민주화 1호 법안’으로 불려온 ‘하도급법 개정안’을 통과시켰을 때부터 그랬다. 대기업이 납품단가를 후려치면 ‘징벌적 손해배상’이었다.

그렇더라도, D사의 사례처럼 중소기업도 납품단가를 깎아야 할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중소기업에게는 그게 사활이 걸린 문제가 될 수도 있다.

납품업체들은 오랫동안 계속된 거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한두 번쯤의 납품단가 인하를 받아들일 수도 있다. 다음 거래 때는 가격을 올려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생태계 구축 방안’에 따르면, 그 한두 번의 납품가격이 수지를 맞추지 못하는 것이라면 ‘부당한 인하’ 지적을 받게 될 것이다. 중소기업을 위한 조치 때문에 정작 D사 같은 중소기업은 골치 아프게 생길 수도 있게 된 셈이다.

대기업을 겨냥한 정책의 ‘유탄’이 중소기업에게 날아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근로시간을 단축하면 중소기업들이 평균 6.1명의 인력 부족을 겪게 될 것이라는 중소기업중앙회 조사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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