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그룹 "선대회장 창업, 가업 승계 차원일 뿐" 일축
이건희 회장의 장녀인 이부진씨가 삼성석유화화의 최대주주에 오르면서 삼성의 후계 구도와 지배구조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호텔신라의 상무를 맡고 있는 이부진씨는 지난 10일 영국 BP(브리티시 페트롤리엄)가 보유하고 있던 삼성석유화학의 지분 중 33.18%를 인수하며 재계의 관심을 끌었다.
삼성석유화학은 섬유의 기초 원료인 고순도테레프탈산(TPA)을 생산하는 회사. 하지만 원재료 가격 상승과 중국의 저가 공세 등으로 지난해 1200억원의 적자를 내는 등 누적 적자가 심한 상태다.
이부진 상무가 삼성 계열사의 최대주주가 된 것은 처음. 삼성 측은 이번 인수가 상속과는 관계가 없는 단순 지분 인수라는 주장이지만, 장기적으론 3세 승계를 본격화하기 위한 포석일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특히 이부진 상무가 최대주주가 된 삼성석유화학을 중심으로 화학 계열사들의 구조조정, 이 상무와 둘째 달인 이서현 제일모직 상무보간의 역할 배분 등에도 변화가 오는 게 아니냐는 관측들이 나오면서 일각에서는 삼성가의 둘 딸들의 홀로서기가 본격화되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이부진 상무, 삼성석화 인수
지난 10일 삼성그룹에 따르면 이부진 상무는 이날 영국 BP가 전량 매각한 삼성석유화학 지분 47.41% 중 33.2%를 인수했다. 주당 인수가격은 37.23달러, 인수금액은 약 450억원으로 알려졌다. BP의 잔여지분 14.22%는 삼성물산이 192억원에 사들였다.
이로써 이부진 상무는 삼성석유화학의 1대 주주에 올랐고, 삼성물산은 27.27%로 2대 주주가 됐다. 나머지는 제일모직 21.38%, 삼성전자 12.96%, 신세계 5.2%가 보유하고 있다.
일단 삼성 측은 지분 인수에 대해 "상속이나 분가(分家) 등과는 무관하다"는 입장이다.
삼성 관계자는 "영국 BP사가 적자 상태인 삼성석유화학의 보유 지분 인수를 요청했지만, 삼성물산 외에 전자나 모직 등은 적자를 이유로 거부했다"며 "삼성석유화학은 이병철 선대회장이 창업한 기업임을 감안해 이부진 상무가 오너 가족을 대표해 인수키로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창업주가 일군 가업을 승계하기 위한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라는 것.
또한 이건희 회장의 장남인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와 둘째 딸인 이서현 제일모직 상무보가 이번 인수에 나서지 않은 것은 두 사람이 각각 삼성전자와 제일모직에 근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즉, 소속 회사는 삼성석유화학 지분 인수에 참여하지 않는데 그 회사 임원이 지분을 인수하는 것은 여러모로 모양새가 좋지 않다는 판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삼성 관계자는 "이부진 상무가 삼성석유화학의 최대주주가 됐지만 회사 경영에는 관여하지 않을 방침"이라며 "호텔신라 경영에 상당 부분 참여하고 있어 삼성석유화학 경영에 개입하지 않고 1대 주주로서 역할만 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 상무 위상 강화되나
하지만 재계는 삼성측의 설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반응이다.
최근 이부진 상무가 동생인 이서현 제일모직 상무보와 함께 왕성한 경영활동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부진 호텔신라 상무는 올해 들어 중요한 비즈니스를 깔끔하게 처리, 경영자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았다. 이 상무는 경영전략 담당으로서, 지난 6월 호텔신라의 인천공항 면세점 사업자 선정을 성공시켰으며, 9월 삼성상품권 발행도 주도해 부활시켰다.
또 이 상무가 지휘한 서울 장충동 호텔신라 리모델링 결과에 대한 반응도 아주 좋게 평가됐다. 올해 서울 호텔신라는 사상 최대 규모인 1500억원의 매출을 기록할 전망이다.
여기에 삼성 안팎에서 화학계열사가 이건희 회장의 둘째딸인 이서현 상무보에게 갈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는 점에서 업계는 이부진 상무가 삼성석유화학의 최대주주가 된 것을 주목하고 있다.
따라서 삼성석유화학은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삼성전자가 분점하던 형태에서 삼성물산과 이부진 상무쪽으로 급격히 무게 중심이 쏠리게 됐다. 삼성물산이 삼성전자를 포함, 그룹의 여러 계열사에 출자한 중립지대하는 점을 고려하면 이부진 상무의 위상 강화로도 해석할 수 있은 부분이다.
업계 관계자는 "이서현 상무보가 제일모직 패션쪽, 서현씨의 남편인 김재열 상무가 제일모직 케미칼 사업부를 맡고 있어 삼성 화학계열사들은 서현씨와 남편에게 갈 것으로 예상했다"며 "이부진 상무가 삼성석유화학의 최대주주가 됐다는 것은 후계구도의 변화를 의미하는 게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이와 함께 적자투성이 회사를 인수한 점에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값싼 중국산에 밀려 지난해에도 1200억원의 적자를 낸 삼성석유화학을 삼성측이 인수함으로써 삼성이 삼성석유화학을 중심으로 화학 계열사에 대한 구조조정에 나설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인다.
삼성은 석유화학 계열사로 삼성토탈, 삼성정밀화학, 삼성석유화학, 삼성BP화학 등 4개 회사를 갖고 있지만 이들의 실적은 시원찮은 상태.
이 가운데 합작사인 삼성토탈을 제외한 계열사 간 합병이 가능한 상황이고, 비상장사인 삼성석유화학과 삼성BP화학 간 양사 통합이 상대적으로 수월하다는 시나리오가 제기되고 있다.
여기에 삼성석유화학은 단일상품인 TPA 생산에서 탈피해 사업영역을 확대할 계획을 번번이 반대하는 공동 대주주인 BP에서 벗어나 독자경영 체제를 갖춘 이후 삼성석유화학 등 화학 계열사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대책을 내놓지 않겠느냐는 분석이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 대주주 일가의 삼성석유화학 지분 매입은 기존 화학 계열사들을 중심으로 한 지분구조와 향후 사업구조에 획기적인 변화 가능성을 예고하는 것"이라며 "기존 지배구조를 놓고 볼 때 삼성물산이나 삼성SDI 등이 일종의 화학 지주회사 역할을 하는 방향으로 개편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결국 이 같은 체질개선이 이뤄진다면 적자투성이 회사에 인수한 이부진 상무는 대박을 기대할 수도 있다고 점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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