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용의 세상읽기] 가을바람처럼 서늘한 깨우침

오피니언 / 정해용 / 2011-08-26 09:58:51

- 서늘하다. 썰렁하다.

요즘 같은 초가을의 새벽날씨에 어울리는 말일까. 서울시에서 치러진 모처럼 만의 주민투표 결과에 가슴 서늘해지는 정치인들 적지 않을 것 같다. 언젠가부터 한국 정치엔 ‘목숨 건 담판’이라는 게 종종 등장하고 있다. 정치생명을 걸고 담판을 벌이는 일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전매특허로 기억이 되는데, 당시 대통령 후보직을 놓고 벌인 몇 차례의 담판으로 그는 후보시절부터 ‘승부사’란 별명을 얻었다. 만일 그 몇 차례 담판에서 매번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면 이런 영웅적인 별명은 얻지 못했을 것이다.

이번엔 현직 서울시장이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고 담판을 벌였다. 시민 전체를 대상으로 적어도 1/3 이상이 투표에 응해야 하고 그 중 절반이 자신의 의견을 지지해야 한다는, 승리의 조건이 퍽 까다로운 게임이었다. 결과 1/3의 응답조차 얻지 못하고 패배했다. 여러 가지 해석이나 설명이 따르고 있다. 실패 이유로 꼽을 만한 변수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그 당사자, 오세훈 시장에게 무엇보다 뼈아프게 느껴질 만한 패인은 자신이 속한 한나라당 전체가 적극적인 후원을 보내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닐까.

현실 정치인으로서 패할 것이 빤한 승부수를 던질 사람은 없다. 그가 주민투표라는 승부수를 던질 때는 나름으로 최소 절반 이상 승산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4년 전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표를 던진 서울사람은 33.3%를 넘었고, 한나라당에 대한 지지율도 32% 이상이었다. 또 어떤 상황에 몰두한 사람들이 흔히 빠지는 착시현상도 있다. 주변의 어떤 시비나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소신을 따라 시장업무에 몰두해온 오 시장으로서는 자신을 믿고 따라주는 개인 지지층이 1/3 정도는 충분히 넘을 거라는 기대를 가졌을 법도 하다. 보수 메이저언론에서는 줄곧 여론조사 결과나 시민발언 등의 형식으로 오 시장의 주장이 시민들 사이에서 폭넓게 지지를 받고 있다는 기사를 또 얼마나 많이 실었는가(결정적으로 그를 감싸는 언론들이 그의 눈을 가린 셈이 되었지만). 그러니까 오세훈 시장으로서는 한나라당이 초당적으로 당 지지자들의 세만 몰아준다면 투표율 33.3%야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을까! -라고 셈을 해본 뒤에 주민투표라는 승부수를 던졌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투표날이 다가오면서 그는 상황이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고 있음을 깨달았던 것임이 분명하다. 대통령 불출마선언을 하고, 시장직을 담보로 내걸었고, 그리고 당 회의에 참석해 응원을 호소하며 눈물을 흘리고 엎드려 큰절까지 했다. 현실이 다가올수록 절박해졌던 게다. 스스로를 ‘한나라당적 가치’를 위해 싸우다 쓰러지는 순교자를 자처한 모양새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그 호소에 충분히 총력적으로 동조하고 지원한 것 같지는 않다. 단순논리 계파간 이해가 엇갈렸나보다 하는 시각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한나라당이 오세훈 시장의 고독한 전투를 더 이상의 적극 행동으로 지원하고 나서지 못한 속내도 더욱 단순한 논리로 이해는 해야 한다. 어린 학생들에 대한 무상급식은, 궁극적으로는 국가가 마땅히 지향해야 할 목적지 가운데 하나다. 어지간한 선진국에서 의무교육기관의 급식 정도는 대개 정부나 지자체 등의 예산으로 거의 무상제공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동안은 나라가 가난해서 이루지 못했다고 치자. 그러나 지금 이 나라의 경제력, 서울의 경제력을 놓고 보면 한 해에 6백억여 원의 재원을 못 만들어 불가능하다고 말하기는 좀 민망스럽다. 어엿한 G-20 의장국이며, OECD 국가들 가운데서도 가장 모범적인 경제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다고 떠들어오지 않았는가. 사실은 우리 경제가 어려워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자니 그동안 정부가 잘 해오고 있다고 발표해온 것이 거짓처럼 여겨질 테고, 경제는 잘 되고 있지만 무상급식에 예산을 쓰기는 아깝다고 주장하자니 한나라당 스스로가 국민 복지에는 전혀 무관심하거나 인색한 정당이라 자백하는 꼴이 될 수밖에 없다. 한나라당으로서는 그의 말이 옳다고도, 그르다고도 할 수 없는 난처한 선택을 강요당한 셈이다. ‘지지하면서도 지지하지 않고, 지지하지 않으면서도 지지하는’ 지극히 정치적(!)인 입장으로 오 시장의 선택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연간 홍보성 이벤트 한두 건만 줄여도 마련할 수 있는 몇백억 원 때문에 의무교육 전면 무상급식을 못하겠다는 주민투표는, 연간 3백조 원의 공식 예산을 사용하는 나라에서 국제적 체면에도 문제가 있다. 오 시장이 여당에게 너무나 난감한 문제를 냈던 셈이다.

정치인이 자기 소신의 함정에 스스로 빠지지 않고 객관적 시야를 유지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곁에서 자신을 응원하는 집단의 열광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것은 또 얼마나 위험한 덫이 되는가. 가을바람만큼이나 가슴 서늘한 깨우침이다. 물러나는 오 시장의 경우를 지켜보는 언필칭 지도자들이 깊이 깨우쳐야 할 준엄한 교훈이 될 수 있을 듯하다.



정해용 상임논설위원(peacepress@hanmail.net)



[ⓒ 토요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뉴스댓글 >

    많이 본 기사

    S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