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기 뒷짐 진 한 아이가 있다. 맨발에, 헝겊을 덧대 기운 누더기 옷을 입었다. 예쁘지도 사랑스럽지도 않다. 하지만 이 아이는 모든 것을 지켜보고,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이 아이의 이름은 ‘한잘라’다.
국내에는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팔레스타인 출신의 세계적인 시사만화가 나지 알 알리(1936~1987년) 그림은 아랍 세계는 물론 유럽과 미국의 대도시 벽에도 크게 그려져 있을 만큼 영향력이 있다.
아랍어로 ‘쓰라림’, ‘고통’을 의미하는 ‘한잘라’는 나지 알 알리가 탄생시킨 주인공으로, 알 알리의 거의 모든 만평에 등장해 저자의 분신이면서 동시에 가난하고 힘없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대변한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 건국으로 인해 고향에서 쫓겨난 1948년, 나지 알 알리는 열한 살이었다. 그래서 한잘라는 언제나 열한 살 소년으로 그려졌다. 한잘라는 나이를 먹을 수가 없었다. 한잘라마저 늙는다면,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처참한 상황이 잊히고 당연시되고 말 것이다
못생기고 누추한 모습 때문에 그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더욱 사랑스런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한잘라를 통해 자신들이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 가난한 중동의 고아라는 현실을 절감했을 것이다.
아랍 주요 일간지에 만평을 그린 그였지만 이스라엘이나 미국만 비판하지는 않았다. 나지 알 알리는 비판해 마땅한 곳을 비판하는 데 타협하지 않았고, 팔레스타인과 아랍 민중을 괴롭히는 복잡한 문제들을 펜으로 탁월하게 전달했다.
이스라엘의 야만스런 행위뿐만 아니라 미국과 결탁해 오일머니로 배를 채우는 아랍 지배 계급, 겉으로는 팔레스타인 난민을 대변하는 척하며 자기 잇속만 챙기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지도층 등 아랍의 지배 계급들이 미국과 어떻게 직간접적으로 결탁하고 한통속이 되는지, 아랍 민중을 억압하는 모두가 알 알리의 날카로운 펜으로 촌철살인 한 컷에 표현됐다.
한잘라는 어떤 일이 있어도 움츠리지 않는다. 언제나 뒷짐 진 모습으로 뭔가를 세심하게 살펴보는 것처럼 독자와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 그리고 1982년,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해 팔레스타인 난민 수천 명을 학살하자 한잘라는 마침내 두 손을 번쩍 들고 분노를 표출하며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는 만평으로 인해 생긴 수많은 적에게 위협을 받으면서도 결코 타협하지 않았다. 그러나 1987년 아직도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괴한의 총에 머리를 맞고 유명을 달리했다. 하지만 그의 저항은 현실이 됐다. 그가 암살된 그해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대규모 반이스라엘 투쟁(인티파다)이 일어났다.
이 작품들은 1970~1980년대에 그려졌지만, 팔레스타인과 중동의 상황은 그때보다 더 나아지기는커녕 악화되었고 그의 만평은 여전히 유효하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그 통찰력은 더욱 빛나고 있다.
<열한 살의 한잘라>는 팔레스타인의 현실과 이스라엘의 야만, 아랍 세계와 미국의 위선을 한 컷 만평에 예리하게 담아 낸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작품집이다. 그의 만평에는 웃음보다 슬픔이, 통쾌함보다 애틋함이 흐른다. <열한 살의 한잘라>, 나지 알 알리 저, 강주헌 역, 조 사코 서문, 1만2800원, 시대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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