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남표 총장을 둘러싼 KAIST 내분 사태가 일단락 된 모양새다. KAIST 이사회는 서남표 총장을 해임하는 대신 스스로 물러나도록 결정했고 서 총장역시 이를 받아들여 내년 2월 졸업식 이후 자진 사퇴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됐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사회와 총장간의 합의일 뿐 교수, 학생들과 남은 문제는 현재진행형이다. 서 총장 역시 내년 1월 후임 총장 선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는 뜻을 밝혀 서남표 사태는 계속 논란이 될 전망이다.

KAIST 이사회는 25일 오전 서울 반포동 JW메리어트 호텔에서 제219회 임시이사회를 열어 서남표 총장이 이날 제출한 내년 2월 23일자 사직서를 수리하기로 의결했다.
이사회는 이날 서 총장에 대한 계약 해지 안건과 총장이 이사장에게 전달했던 10월 20일자 사임서에 대한 처리 방침을 논의할 예정이었으나 서 총장을 해임하거나 계약을 해지할 경우 뒤따를 것으로 보이는 법적 소송과 파장 등을 우려해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으로 분석된다.
◇ ‘교육자’인가 ‘경영자’인가
서남표 총장과 학교 이사회 간 갈등은 꽤 오래 진행됐다. 학교 운영 과정에서 각종 문제가 불거지며 학내외에 총장 퇴진론이 크게 대두됐다.
학생들의 연쇄자살 이후 학내에서는 총장의 ‘대학발전’이라는 명목 하에 학생들을 정글로 내몰아 죽게 만들었다는 비판이 줄을 이었고 학생과 교수들은 총장의 학교 운영이 ‘교육’이 아닌 ‘경영’이라며 서 총장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그가 처음부터 이런 처지에 놓인 것은 아니다. 성적에 따라 수업료를 차등해서 내게 하는 징벌적 등록금제 도입과 전 과목 영어 수업화를 추진했고 교수직 심사를 강화해 40명을 탈락시켰다.
높은 자리에 올라 학생과 교수들을 열심히 경쟁시킨 덕분에 KAIST는 세계대학평가에서 순위가 해마다 상승했고 기부금도 많이 늘어났다. 당시 서 총장은 ‘대학 개혁의 전도사’로 불리며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시일이 지나면서 부작용이 나타났다. 경쟁 일변도의 개혁으로 학내 갈등이 심화됐고 급기야 지난해에는 학생 4명과 교수 1명이 잇달아 자살하는 사태가 벌여졌다. 개혁에 따른 압박감이 연이은 자살사건의 원인으로 지목받았고 교수협의회와 총학생회가 퇴진을 요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총장 자신도 특허권 도용과 교수 임용 특혜 등의 의혹으로 교수 사회와 불화를 겪었다. 교수들은 두 차례 투표에서 총장을 불신임했고 총학생회가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75%가 서 총장의 사퇴에 찬성했다.
◇ ‘서 총장 대 이사회’ 전쟁으로 확대
이러한 압박은 결국 지난 7월 ‘학내외 여론이 나빠져 빠른 조처가 불가피하다’는 이유로 이사회에 계약 해지 안건이 상정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오명 이사장과 서 총장은 ‘합의’를 통해 해결하겠다는 결정을 내렸고 두 사람의 합의사항은 공개 되지 않았으나 세간에는 서 총장이 10월에 사퇴할 것이란 이야기가 전해졌다.
그러나 서 총장은 지난 17일 기자회견을 갖고 내년 3월에 사퇴하겠다고 밝혔고 갈등은 3개월 만에 재점화 됐다. 서 총장은 “남은 총장 임기가 2014년 7월까지지만 내년 3월 정기 이사회를 끝으로 임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에 KAIST 이사회는 25일 임시 이사회를 열고 서 총장의 거취에 대해 결정키로 했다. 그러나 논란은 계속됐다. 이사회 하루 전인 24일 서 총장 측은 “이사회가 합의를 지키지 않았다”며 이사회를 공격했다.
서 총장 측은 지난 7월 오 이사장과 서 총장 간에 있었던 합의사항을 공개하고 총장 사임서 처리에 관한 이사회 안건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강행 땐 법률적 대응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서 총장 측에 따르면, 비공개를 전제로 작성된 합의 내용이 이행되지 않아 합의서 작성 직후 서 총장이 ‘이사장의 약속 위반’을 이유로 오명 이사장에 사임서 위임을 철회했다는 것이다.
당초 다음날 25일 열릴 임시 의사회에서는 서 총장이 10월에 스스로 물러나겠다는 약속을 깨고 내년 3월로 사퇴시기를 미루겠다고 발표한 것에 대해 받아들일 수 없다는 취지로 준비됐다.
하지만, 총장에 대한 계약을 해지하면 배상 책임에 따라 총장 잔여 임기의 연봉인 51만달러를 물어줘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결국 해지 안건을 처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계약 해지 시 90일의 유예기간을 거쳐야 해, 결국 총장이 밝힌 3월보다 불과 한 두 달 더 앞당겨질 뿐이기 때문이다.
총장이 스스로 나가는 모양새를 취함으로써 이사회에 쏟아지는 공격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서 총장은 스스로 밝힌 사퇴 시기보다 불과 며칠 앞서 내년 2월 졸업식을 끝으로 KAIST를 떠나게 됐다.
하지만, 총장이 내년 1월 후임 총장 선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이에 반해 교수들과 학생들은 이사회의 결정에 대해 반발하고 있어 후폭풍이 예상된다.
경종민 교수협의회장은 “이사회의 결정은 받아들일 수 없다. 교수들은 이 시간 이후로 서남표를 총장으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교수협 총회를 열어 앞으로 어떻게 대응할지 등을 논의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KAIST 학생회도 서 총장의 해임안이 통과되지 않을 경우, 총장실을 점거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 KAIST의 새로운 ‘전통’이 될 총장 해임
KAIST 내부 구성원들은 서 총장과 구성원 간 갈등의 원인을 총장의 개혁 만능주의에서 찾는다. KAIST 교수협의회는 “형식에 치중한 개혁으로 내외부의 지지기반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음에도 언론과 정치권에 대한 홍보에만 연연해 왔다”고 지적했다. 경종민 교수협의회장은 “문제를 지적하는 이들은 ‘개혁 거부 세력’ 딱지를 붙여 몰아세웠다”고 비판했다.
KAIST 총학생회는 “총장 퇴진을 요구하는 진짜 목적은 민주적인 학교를 만들기 위한 것”이라면서 “서 총장이 강화해온 불합리한 의사결정구조를 없애는 것을 시작으로, 다음 총장 선출 과정에는 학생이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서는 이 같은 내부 구성원들의 반발에 대해 우리 사회가 '이방인'의 개혁 리더십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돼 있기 때문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서 총장은 미국 매사추세츠 공대(MIT) 교수 출신으로 국내에는 학맥과 인맥이 없다. 때문에 서 총장에 대한 비판이 과학계의 학맥 및 인맥 갈등의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앞서 지난 서 총장의 전임이었던 로버트 러플린(노벨물리학상 수상) 총장도 ‘미국식 개혁’을 지휘하다 교수들의 집단퇴진 압력을 받고 지난 2006년 임기 2년을 남기고 중도 사퇴했다. 결국 서 총장도 겉으로는 자진 사퇴 형식이지만,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쫓겨난 러플린의 전철을 밟게 됐다. 이것은 어쩌면 KAIST의새로운 ‘전통’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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