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들에 대한 성폭력은 전 세계적인 이슈이며 지구상의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행위다. 국내에서도 최근 일련의 아동 성폭력 사건들은 느려터진 검·경찰과 사법부를 움직이게 만들었고 자신들의 이익 이외엔 관심 없는 국회의원들마저 움직이게 할 정도로 매우 중대한 사안이다. 이 와중에 최근 영국 국영 방송 BBC의 유명 어린이 방송 진행자가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수많은 아동들을 성추행·성폭행 해온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 영국사회의 분노가 격화되고 있다.

지난 3일 BBC의 경쟁사 ITV는 인기 어린이 TV 프로그램을 진행한 영국의 유명 진행자 지미 새빌의 성폭행 의혹을 파헤친 다큐멘터리를 방송했다.
엉뚱한 유머감각과 은발을 트레이드마크로 1960년대와 1970년대 영국에서 문화적 아이콘으로 떠올랐던 그는 1960년대 유명 음악 프로그램 ‘탑 오브 더 팝스’를, 1970년대에서 1990년대 중반까진 어린이 프로 ‘지미 윌 픽스 잇’을 맡았다.
프로그램 방영 이후 진실 규명 요구는 거세지고 있다. 사건의 중심에 놓인 새빌이 이미 죽어서 공소권 성립이 안 되는 상황이지만 영국 정치권과 수사 당국은 사회 지도층의 아동 등 약자에 대한 성범죄를 중대 범죄로 규정하고 무덤을 뒤져서라도 단죄한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크리스 그레일링 법무장관은 “새빌의 혐의에 대한 수사는 적절한 조치”라며 철저한 수사를 독려했고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도 “권력을 앞세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성범죄는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며 사건의 진상 규명을 촉구했다.
◇ 방송직후 또 다른 피해 증언 쏟아져
앞서 새빌은 생전에 소아성애자라는 루머를 부인한 바 있다. 그는 지난 2000년 영국 저널리스트 루이 데로스가 제작한 다큐멘터리에 출연해 “내가 소아성애자인지 아닌지 아무도 알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폭로- 지미 새빌의 또 다른 면’이란 제목의 이 ITV 다큐멘터리에서 인터뷰한 피해여성 5명 중 4명은 그에게 만 14세와 15세 때 성추행을 당했고, 다른 1명은 16살 때 성폭행을 당했다고 밝혔다. 여기에 전직 BBC 직원 두 명도 새빌이 소녀들을 성추행하는 장면을 목격했거나 의심된다고 증언했다.
프로그램 방영 직후 새빌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또 다른 증언이 방송사에 물밀듯이 쏟아졌다. 새빌이 병원에서 자원봉사를 할 때 어린 환자들을 추행했다는 주장과 기숙학교 재학시절 성추행을 당했다는 피해자 주장 등이 속속 이어졌다. BBC 방송국 내 분장실, 자동차, 호텔방 등의 장소에서 새빌에게 성폭행 당했다고 주장하는 여성도 여러명 나타났다.
방송에서 의혹이 제기된 후 런던지방경찰청은 진상 규명 조사에 착수했다. 경찰은 당초 조사 결과를 보고서 형태로 공개할 예정이었지만 지난 19일(현지시간) 정식 형사조사를 개시를 밝혀 지난 수주동안 영국과 BBC를 휘저어놓고 있는 스캔들은 급물살을 탈 전망이다.
앞서 런던경찰청은 현재 이 문제를 조사하고 있으며 BBC는 경찰 조사에 최대한 협조하고 있다고 밝혔다. 경찰청은 “BBC와 아동보호자선단체의 대표들과 만났다”며 “현재 영국의 다양한 소식통이 입수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지난 19일(현지시간) 경찰청은 “지난 2주동안 알아본 결과 정식 조사를 요하는 사건이라고 판단했다”며 “단순 조사에서 정식 형사조사로 발전했다”고 밝혔다. 피터 스핀들러 경시장은 “지금까지 200명이 넘는 피해자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유례없는 대규모 피해 사례”라고 표현했다.
◇ “BBC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사건의 불똥은 BBC로 튀었다. 여론이 악화되자 애초 성추행 증거가 없다고 발뺌했던 BBC 역시 말을 바꿔 이 문제에 관해 독자적으로 수사를 두 차례에 걸쳐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BBC는 성명을 내고 새빌과 관련된 주장에 충격을 받았다며 이는 경찰이 조사할 심각한 범죄라고 밝혔다.
불과 한달 전 취임한 엔트위슬 BBC 사장은 지난 12일(현지시간) 성명을 내고 BBC를 대표해 피해자들에게 사과했다. 그는 “이번 사건을 규명하고 다시는 BBC 내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BBC 대변인은 “경찰과 긴밀히 공조해 본 사건을 즉시 검토하도록 자넷 전 판사에게 요청할 것”이라고 밝혔다. 조사에 대해 엔트위슬은 “법의학적 수사이면서 자기반성이 담긴 조사가 될 것”이라며 “시청자들에 대한 신뢰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과거 BBC의 만연한 성차별적 문화가 폭로되면서 논란이 더욱 커질 전망이다. 1987년 BBC 라디오1의 DJ로 일했던 리즈 커쇼는 자신의 프로그램에서 “(지미 새빌)의 행위는 방송국 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었고 방송국에서 일하는 사람 모두 새빌과 어린 여학생에 대해 농담했다”고 밝혔다.
BBC 편집정책 이사 데이비드 조던이 “새빌이 BBC 방송국 내에서 이 같은 범법행위를 저질렀음을 확인했다”며 “현재 수많은 여성이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BBC 방송사에서 지미 새빌에게 성추행과 성폭행을 당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해 BBC 내부에서는 이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 BBC, ‘알고도 은폐’ 프로그램 폐기까지
그러나 이 의혹이 일반에 알려지기 전 한 BBC 뉴스프로그램에서 이를 보도하려다 삭제된 사실이 드러나 BBC는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BBC는 서둘러 수습에 나섰으나 ‘꼬리자르기’라는 의심을 피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앞서 작년 12월 BBC는 자사 주요 프로그램인 ‘뉴스나이트’를 통해 새빌이 아동 성추행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은 사실을 밝히려 했으나 이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폐기 됐다. 당시 새빌은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BBC는 당시 지미 새빌과 관련된 뉴스를 빼라고 결정한 고위 관계자에 정직 처분을 내렸다. 불방 과정에 대한 해당 팀의 해명이 부정확하고 불충분한 것으로 드러나 이같이 조치했다고 밝혔다. BBC는 “기사를 내보지 않기로 결정한 프로그램의 편집 책임자 피터 리펀의 해명이 석연치 않다”며 “조사하는 동안 리펀의 직무를 즉시 정지시킨다”고 밝혔다.
리펀은 앞서 은폐 의혹이 제기되자 “취재한 피해자의 증언에서 기존 경찰 수사보다 새로운 점이 없었다”며 “편성 상의 결정이었을 뿐 진실을 감출 의도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BBC는 방영되지 못한 프로그램 내용중 일부 피해자 증언과 혐의는 이전에 경찰이 파악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BBC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엔트위슬 사장 역시 BBC가 새빌의 비행을 폭로하는 대신 새빌 헌정 프로그램 세 편을 방영하는 과정에서 이 같은 논란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어 BBC의 고위층들이 자사의 대스타인 새빌의 범죄를 덮으려 했다는 의혹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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