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부 주유소 경유값, 휘발유 앞질러
정부 대책 없이 에너지 절약만 강조
국제유가가 연일 신기록 행진을 벌이면서 그 여파가 한국경제를 강타하고 있다.
23일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지난 22일 국제시장에서 거래된 두바이유 현물가격은 전일대비 배럴당 5.28달러 급등한 128.97달러에 거래를 마쳐, 사흘 연속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미국 뉴욕상업거래소에서 거래된 서부텍사스산중질유(WTI)는 130.81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현물시장에선 배럴당 130달러를 왔다 갔다하고 있으며, 선물시장에선 140달러 진입을 앞두고 있다. 배럴당 150달러 시대 개막이 멀지 않은 셈이다.
이처럼 전 세계가 고유가의 충격에 빠져든 가운데 에너지의 해외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 역시 충격을 받고 있다. 3차 오일쇼크가 올 수도 있다는 분석도 제기되고 있다.
당장 원자재 가격 급등으로 교역조건이 사상 최악의 수준으로 떨어졌다. 국내 산업계는 초비상 상태에 돌입했으며, 물가급등에 성장률 저하로 기업들의 고용악화에 따른 국민의 이중.삼중고가 예상되고 있다.
실제로 국내 유가가 리터당 2000원을 눈앞에 두고 있으며, 휘발유-경유의 가격 차이가 리터당 몇십원밖에 나지 않는 등 경제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특별한 대책 마련보다는 에너지 절약 방법만 강조하고 있다. 그동안의 단기 대책들이 실패로 돌아가자 장기적인 에너지 절약 방법에 기대는 것이다.
교역조건 최악.물가상승 '악영향'
지난 4월 원유 도입단가는 99.7달러를 기록했고, 이달에는 100달러는 훌쩍 넘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올해 원유 9억 배럴 정도를 수입하는 우리나라는 원유도입 비용으로만 900억달러 이상을 지불해야 할지도 모른다.
에너지 수입에 더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하니 우리나라 교역조건이 크게 나빠졌다.
한국은행이 지난 22일 발표한 '2008년 1/4분기 중 무역지수 및 교역조건 동향'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순상품교역조건 지수(20005년=100)는 작년 말에 비해 6.7% 하락한 80.5를 기록했다. 이는 한은이 관련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1988년 이후 분기 기준으로는 가장 낮은 것이다.
순상품교역조건 지수는 한 단위 수출대금으로 수입할 수 있는 물량을 뜻하며, 이 지수가 80.5라는 것은 2005년 1개를 수출하고 100개를 수입할 수 있었다면 올해 1분기에는 80.5개만 수입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출 단가는 낮아지고 수입 단가는 올라 수출을 해도 남는 게 없는 셈이다.
한은은 "수출물량이 크게 늘었음에도 불구하고 원유와 곡물 등 원자재 가격의 급등으로 수출단가보다 수입단가가 큰 폭으로 상승하면서 교역조건이 악화됐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수출단가는 석유제품(9.8%), 경공업제품(2.8%)이 전기 대비 상승했으나 주력 수출품목인 반도체와 철강 등 중화학공업제품의 단가는 3.4% 하락하면서 전체적으로 1.9% 하락했다. 반면 수입단가는 원유 등 원자재와 곡물 등 소비재를 중심으로 전기 대비 5.2%나 뛰었다.
무역수지 역시 수출이 두 자릿수 증가율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원유 수입액이 40~50%씩 늘어나면서 올해 들어 4월까지 넉 달 연속 적자를 기록 중이다. 원유가 상승에다 환율 급등의 영향으로 인플레 압력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이로 인해 지난달 4.1% 상승을 기록한 소비자 물가는 더욱 가파르게 오를 것으로 보인다. 원재료 물가는 1년 전보다 무려 56%나 폭등했다. 일자리 증가는 3~4월 연속 전년 동월에 견줘 20만개를 밑돌았다. 물가상승이 소비 침체를 부르고, 그것이 고용에 악영향을 주는 악순환이 이어질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삼성경제연구소는 국제유가가 연평균 151달러를 넘어설 경우 우리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서는 3차 오일쇼크를 겪을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휘발유-경유 2천원 시대
이러한 유가 상승으로 국내 휘발유?경유 가격은 리터당 2000원 수준으로 치솟았다. 특히 일부 주유소는 휘발유 가격보다 경유 가격이 더 높게 책정되고 있다.
22일 한국석유공사의 '오피넷'에 따르면 20일 판매가 기준으로 서울 강남구 역삼동 A주유소 휘발유 가격은 리터당 1987원이며, 강남구 주유소 전체의 평균 가격은 리터당 1927원에 이른다.
경유 가격 역시 1900원대를 넘어서고 있으며 일부 주유소는 휘발유 가격을 앞지르기도 했다. 22일 오피넷에 따르면 서울 서초구의 한 주유소는 경유가격(1914원)을 휘발유 가격(1899원)보다 높게 책정해 공급했다. 이 같은 경유값 역전 현상은 서울 수도권 뿐 아니라 강원지역 등으로 늘어나고 있어 경유대란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는 이달 들어 국제 현물시장에서 2주 동안 국제 경유가격(배렬당 162.8달러)이 휘발유가격(239.5달러)에 비해 높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으며, 중국과 인도 등 개발도상국의 대규모 수요가 겹쳐 경유 가격이 상승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최근 들어 정유사들도 지난 19일을 시작으로 경유가격을 휘발유 가격보다 순차적으로 높게 공급하기 시작하면서 곧 전국 주유소에서 경유의 고지가격이 휘발유보다 비쌀 것으로 보인다.
업계는 국제 현물시장에서 유가가 계속 상승세를 타고 있어 조만간 리터당 2000원선을 넘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고유가폭탄 맞은 산업계
유가급등이란 직격탄을 맞은 산업계 전반이 '고사 직전'의 위기로 몰리고 있다.
원자재 부담으로 공장을 돌려도 적자가 나고 공장을 중단하면 유지관리비 등으로 손해가 커지는 진퇴양난의 어려움에 직면해 있는 상태.
특히 고환율로 고통 받고 있는 항공업계의 고통은 심각한 수준이다. 전체 매출에서 항공유가 차지하는 비중은 30% 수준으로, 기름값 등락에 따라 호사 전체의 수익이 크게 달라진다. 때문에 최근처럼 기름값이 하루가 다르게 오를 경우 손실은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 밖에 없다.
대한항공은 유가가 1달러 오를 때마다 연간 310억원의 비용이 추가로 발생한다고 한다. 국제선의 경우 유류할증료로 항공료를 올리고 있지만 유가폭등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다.
아시아나항공의 경우 지난해 1분기 2234억원이었던 유류비용이 올해 1분기에는 3129억원으로 40%나 급증했다. 아시아나항공 관계자는 "수익성이 떨어지는 노선의 조정도 검토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대책이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두 항공사는 현재 항공기 엔진개조, 탑재물품 최소화 등을 통해 기름값을 아끼고 있다.
해운업계도 비상사태다. 매출원가 대비 유가 비중이 15%에 달하는 데다 주로 쓰는 벙커C유의 경유 1년간 톤당 370달러에서 590달러까지 치솟으면서 채산성이 크게 악화됐다. 특히 컨테이너선 부문의 영업이익률은 1%에 그쳐, 유가폭등이 지속되면 적자운영이 불가피 할 것으로 보인다.
한진해운 관계자는 "원가절감에 노력하고 있지만 유가상승을 운임에 제때 반영할 수 없는 상황이라 앞으로도 적지 않은 어려움이 예상된다"고 우려했다.
화물업계 피해도 만만치 않다. 특히 휘발유보다 비싼 경유가는 화물업계에 직격탄을 날렸다. 화물연대본부 관계자는 "서울-부산 왕복운임이 대략 70~80만원 선인데 경유값 상승으로 기름값만 60만원이나 된다"며 "장사를 하면 할수록 손해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석유화학업계 사정도 비슷하다. 원유 정제 과정에서 나오는 나프타로 벤젠, 자이렌, 에틸렌 등 기초 원료를 생산하는 석유화학업계는 유가급등이 곧바로 비용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어 공장 가동 중단까지 검토하고 있다. 특히 영세기업들의 타격이 크다. 세제용기 생산원료인 폴리에틸렌의 경우 올 들어서만 40~50% 가량 폭등했지만 제품값은 10%도 못 올리고 있다.
플라스틱연합회 관계자는 "최근 유가 급등에 따라 부도 직전까지 간 회사가 여럿 있다"며 절박한 상황을 토로했다.
정부 "에너지 절약밖엔 없다"
당초 올해 국제 유가가 80달러 대에서 움직일 것으로 예상했던 정부도 고민이 클 것으로 보인다.
최근 기획재정부는 경제동향 보고서를 통해 "경제가 정점을 통과해 하강 국면에 진입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며 "향후에도 세계 경제 둔화, 유가 및 교역조건 악화 등에 따라 추가적인 경기 위축이 우려된다"고 진단한 바 있다.
그러나 정부가 선택한 방법은 에너지 절약 방법. 고유가 기조가 정착되는 것으로 판단하고 단기 대책보다는 장기적인 대책으로 에너지 절약 방법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지난 23일 "근본적인 산업 구조를 바꾸는 것과 에너지 절약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재훈 지식경제부 제2차관도 전날 과천 청사 인근에서 기자간담회를 통해 "고유가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에너지를 절약하고 에너지 소비구조를 바꾸는 수 밖에 없다"고 밝혔다.
자원 외교, 대체 에너지 개발 등이 에너지 부족을 공급 측면에서 해결하려는 움직임이라면 절약과 구조 변화는 수요 측면에서 이뤄지는 해결 방안이다.
사실 정부가 이렇게 에너지 절약을 강조하는 것은 물가 상승으로 어려움을 겪는 서민들을 위해 내놓은 단기 정책들의 효과가 오래 지속되기 않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정부는 3차례에 걸쳐 '서민생활안정 태스크포스(TF) 회의'를 열고 유류세 10% 인하, 주유소 판매가격 공개, 할당관세 인하 등의 대책을 내놓았다. 커피, 맥주 등 6개 품목에 대한 국내외 가격차 조사도 이뤄졌다.
그러나 유류세 인하 효과는 유가 급등으로 한 달도 안돼 사라졌다. 또 조금이라도 싼 주요소를 찾아가라며 주유소 판매가격을 공개했지만 이미 휘발유 값은 천정부지로 올라 어느 곳을 비교해도 2000원에 육박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정부가 추가로 내놓을 대책도 마땅치 않다. 재정부 관계자는 "충격 완화 방안을 찾고 있지만 뾰족한 수단이 없다"며 "(대책을 마련하는데)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여기에 정부는 일부에서 제기되는 유류세 추가 인하에 대해서 검토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훈 차관은 "일부에서 경유값이 휘발유값을 넘어서기도 했지만 어떤 조치를 할 단계는 아니다"며 "중국 정제시설 보수가 이달로 끝나기 때문에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또 이 차관은 "유가 상승기에 유류세 인하는 바람직하지 않다"며 "아직 조세체계를 고칠 때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재정부 관계자도 "유류세를 내리면 결국 정부가 원유 소비를 촉진하는 꼴이 된다"며 "국제적으로 유가 상승은 시장 원리로 해결하거나 절약을 장려하는 측면에서 이뤄지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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