랩·신탁 ‘관행’에 민사책임 물었다…증권사 최대 70% 배상

증권·자본시장 / 위아람 기자 / 2026-06-30 15:43:43
금감원 분조위, 선관주의·충실의무 위반 첫 인정…행정제재 넘어 투자자 손해배상 기준 제시
▲금융감독원[연합뉴스]

 

증권사들이 채권형 랩어카운트와 특정금전신탁을 운용하며 관행적으로 활용해 온 ‘만기 미스매칭’과 고가 거래에 대해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금융당국의 첫 판단이 나왔다. 단순히 상품 운용 결과가 나빴다는 이유가 아니라, 증권사가 고객 재산을 관리하는 과정에서 지켜야 할 선관주의와 충실의무를 위반했다는 점이 배상 책임의 근거가 됐다.

금융감독원 금융분쟁조정위원회는 지난 29일 채권형 랩 상품에서 손실을 본 투자자 2명이 제기한 분쟁조정 안건을 심의하고, 해당 증권사가 손해액의 60~70%를 배상하도록 결정했다. 신청인 한 곳에는 손해액의 70%인 12억6000만원, 다른 한 곳에는 60%인 3억9000만원을 지급하도록 했다. 업계에 따르면 조정 대상 증권사는 NH투자증권이다.

이번 분쟁은 2022년 하반기 레고랜드 사태 이후 단기자금시장이 경색되고 시장금리가 급등하면서 불거졌다. 법인 고객의 단기 여유자금을 운용하던 증권사들은 채권형 랩·신탁 자금으로 상품 만기보다 잔존만기가 긴 기업어음(CP)과 채권을 매입했다. 금리 상승으로 채권 가격이 급락하고 만기 시점에 자산을 제값에 처분하지 못하면서 환매 연기와 손실이 발생했다.

분조위는 해당 증권사가 랩 상품 만기를 약 2개월 앞둔 상황에서 잔존만기가 약 10개월인 채권과 CP를 편입하고도 시장 상황 변화에 대비한 위험관리를 충분히 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상품의 운용기간과 편입자산의 만기가 크게 어긋난 상태에서 유동성 확보 방안도 제대로 마련하지 않아 고객 손실을 키웠다는 것이다.

CP와 채권을 시장의 민간채권평가회사 평가금리보다 높은 가격으로 매수한 점도 문제로 지적됐다. 분조위는 고가 매수 거래의 상당 부분이 해당 계좌의 이익보다 다른 고객 계좌의 목표수익률을 맞추기 위한 목적에서 이뤄졌다고 봤다. 특정 고객에게 돌아갈 손실을 다른 고객 계좌로 이전하는 방식의 거래는 고객 재산을 독립적으로 운용해야 한다는 투자일임업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판단이다.

선관주의 의무는 금융회사가 고객 재산을 전문가에게 요구되는 합리적인 주의를 기울여 관리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충실의무는 회사나 다른 고객의 이익보다 해당 투자자의 이익을 우선해야 한다는 뜻이다. 분조위가 투자일임업자의 선관주의와 충실의무 위반을 근거로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손해액은 투자자가 상품 만기 때 정상적으로 받을 것으로 예상됐던 원금과 수익에서 실제 상환받은 금액을 빼는 방식으로 산정됐다. 단순한 원금 손실뿐 아니라 증권사가 제시했던 목표수익률에 미달한 부분까지 손해 범위에 포함한 것이다. 배상비율은 관련 민사소송의 1심 판단과 투자자의 상품 이해도, 당시 시장 변동성 등을 고려해 60~70%로 정해졌다.

이번 결정은 증권사의 랩·신탁 운용 문제에 대한 책임이 행정제재에 그치지 않고 고객에 대한 직접적인 배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금융위원회는 지난해 2월 NH투자증권과 미래에셋증권, 한국투자증권, KB증권, 하나증권 등 9개 증권사의 채권형 랩·신탁 관련 위법행위에 대해 총 289억720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하고 기관경고 등의 제재를 확정한 바 있다.

앞으로 유사한 손실을 본 법인 투자자들의 추가 분쟁조정과 소송에도 이번 결정이 기준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크다. 증권사 입장에서는 채권 편입가격의 적정성뿐 아니라 상품 만기와 자산 만기의 일치 여부, 계좌 간 거래의 독립성, 유동성 관리 절차 등을 다시 점검해야 할 부담이 커졌다.

다만 분조위 결정만으로 배상이 확정되는 것은 아니다. 신청인과 증권사가 조정안을 받은 날부터 20일 이내에 모두 수락해야 조정이 성립한다. 양측이 조정안을 받아들이면 재판상 화해와 같은 효력이 발생하지만, 어느 한쪽이라도 거부하면 투자자는 별도의 민사소송을 통해 배상 책임을 다퉈야 한다.

 

토요경제 / 위아람 기자 moon@sateconomy.co.kr 

[ⓒ 토요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금감원은 왜 증권사 해외투자 영업에 경고장을 날렸나2026.06.11
뿔난 소비자들, 메리츠화재 창구 넘어 금감원으로 향했다2026.06.16
미래에셋증권, 스페이스X 공모 물량 ‘0주’… 금감원 검사 착수2026.06.16
MSCI 선진국 후보군 진입 또 불발…사상 최대 ‘빚투’에 금감원, 증권사 소집2026.06.24
뉴스댓글 >

    많이 본 기사

    1
    CJ, 중앙일보 인수전 막판 등판…이재현의 투자 공식과 다른 세 가지 변수

    CJ, 중앙일보 인수전 막판 등판…이재현의 투자 공식과 다른 세 가지 변수

    예비입찰에 불참했던 CJ그룹이 중앙일보 본입찰을 사흘 앞두고 다우키움그룹과 공동 인수를 추진하면서 막판 행보를 바꾼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이재현 회장의 기존 투자 결정 패턴에 비춰 새로운 제안이나 거래조건 변화가 작용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17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CJ그룹은 다우키움그룹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오는 19일 중앙일보 인수 본입찰에 참

    2
    정의선 6년, 현대모비스·현대글로비스 '현대차 밖' 성장…현대제철·현대캐피탈 해외 확장

    정의선 6년, 현대모비스·현대글로비스 '현대차 밖' 성장…현대제철·현대캐피탈 해외 확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취임 6년 동안 현대차·기아뿐 아니라 주요 계열사의 사업구조도 달라졌다. 완성차 생산과 판매를 지원하던 계열사들이 외부 고객과 독자적인 시장을 확보하면서 그룹의 수익 기반을 넓히고 있다.14일 취임 6주년을 맞은 정의선 회장 체제에서 주목할 변화는 현대차그룹의 수직계열화가 새로운 성장 방식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점이다.정몽구 명예회

    3
    정의선 6년, 현대차그룹 '추격자의 문법' 바꿔…공장, AI·로봇 키워

    정의선 6년, 현대차그룹 '추격자의 문법' 바꿔…공장, AI·로봇 키워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취임 6년의 핵심 변화는 자동차 제조기반의 활용 범위가 넓어졌다는 데 있다. 기존 공장과 공급망을 인공지능(AI)·로봇 기술의 실증 및 사업화 기반으로 활용하면서 자동차 중심의 산업구조를 확장하고 있다.14일 취임 6주년을 맞은 정의선 회장은 2020년 10월 14일 정몽구 명예회장으로부터 그룹 경영을 이어받았다. 정몽구 체제가

    4
    [게임업계동향] 카카오게임즈 '도깨비의세계' 매출 1위…쿠키런은 할리우드로

    [게임업계동향] 카카오게임즈 '도깨비의세계' 매출 1위…쿠키런은 할리우드로

    게임업계에서 신작 흥행과 지식재산권(IP)을 활용한 콘텐츠 다변화가 이어지고 있다. 카카오게임즈는 신작 MMORPG로 앱마켓 매출 1위에 올랐고 데브시스터즈·그라비티·네오위즈는 영화와 보드게임, 출판·공연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13일 게임업계에 따르면 카카오게임즈(대표 한상우)가 퍼블리싱하고 슈퍼캣이 개발한 2.5D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 &

    5
    SK하이닉스 솔리다임, 美 로비 2022년 종료 신고…신설법인은 해외투자 규제 대응

    SK하이닉스 솔리다임, 美 로비 2022년 종료 신고…신설법인은 해외투자 규제 대응

    SK하이닉스의 미국 낸드플래시 사업이 법인 재편을 거치면서 미국 정부 대응체계에도 변화를 주고 있다. 과거 로비업체의 활동 종료 신고가 확인된 가운데 올해 신설법인이 체결한 계약에는 해외투자 규제 준수가 공식 의제로 등장했다.16일 토요경제가 미국 연방의회 로비활동 공개시스템(LDA)과 SK하이닉스 공시를 분석한 결과, SK하이닉스(대표이사 곽노정)의 미국

    S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