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 작가의 단편소설] 시인의 귀향

기자수첩 / 토요경제 이정 작가 / 2021-06-03 09:43:16

시인의 귀향 - 2




5, 6년 전 나는 러시아 이르크츠크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가설공사의 함경북도 화성군 구간인 18공구에 소속돼 일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통일 전의 남북 정부는 가스 파이프라인을 북한 지역으로 통과시키기로 결정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파이프라인이 재덕산맥을 넘어야 하는 난공사 구간인 이 공구의 현장기사로 나는 일행과 함께 그 심산 속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누릇누릇 단풍이 들기 시작한 잡관목 속에서 무슨 일을 하다가 허리를 펴는 여자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어?

나는 순식간에 시선을 빼앗겼습니다. 휑 꺼졌지만 초롱초롱한 눈망울, 보일 듯 말 듯 파인 보조개, 부드러운 입술에 얹힌 청순한 기운……. 교통사고로 숨진 아내가 거기 있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낯설지 않을 인상이었지만, 분명 세상에 딱 하나밖에 없던 얼굴이었습니다. 결혼 후 첫 여름휴가를 맞아 발리에 도착한 날, 근사한 식당을 잡아 저녁식사를 하고 나오다가 아내는 인도로 질주해 온 트럭에 짓뭉개졌습니다. 내가 빤히 지켜보는 앞에서. 집안 곳곳에 남아 있는 아내의 체취를 피해 이곳에 자원해 왔는데, 아내의 환생이 여기까지 따라오다니. 나는 한참 만에야 내 병이 도졌음을 깨달았습니다. 결코 내게 다시 살아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비슷한 여자만 보면 아내로 착각하는 병.

여긴 송이밭이라요. 저희 마을사람들은 오랜 세월 여기서 송이를 채취해 생활자금으로 요긴하게 써 왔답니다. 이젠 공사 때문에 그럴 수 없게 되었네요. 선생님들께 부탁 드려요. 공사가 끝난 뒤에는 다시 저희가 송이를 채취해서 살아가야 하니 어떻게든 이 송이밭을 잘 보전해 달라요. 조금씩만 따서 잡수시면 일 없겠지요.

흙이 묻은 송이 서너 개를 손에 든 그녀는 내 일행에게 애원하듯 말했습니다. 그녀는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자기 세계에 갇혀 웅크리고 사는 사람 같았습니다. 그 점에서도 아내와 닮았습니다.

우리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여기가 송이밭이라는 사실만은 꼭꼭 가슴에 새기면서. 송이밭 아래쪽에는 방 한 칸 크기만 한 뙈기밭이 있었습니다. 작은 단지 모양으로 속을 막 채우기 시작한 배추가 자라는 중이었습니다. 그 밭도 공사구간을 알리는 팻말 안에 위치했습니다. 주위를 돌아보다가 밭에 눈길을 멈춘 우리에게 그녀는 더욱 스산한 눈빛을 머금었습니다.

"배추 수확은 우리가 확실히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세상 태어나서 한 번도 진지하게 살아본 적이 없을 것 같은 동료 기사가 말했습니다.

그날 저녁식사 시간이 되기 전부터 현장 막사의 식당에서는 송이 향이 진동했습니다. 프라이팬을 올려놓은 전기레인지 주위에 기사들이 둘러서서 송이가 구어지기도 전에 냉큼냉큼 젓가락질을 해댔습니다.

"햐아, 이거 서울서는 1키로에 40만 원도 넘어."

"송이가 남자에게는 그만이라는군."

"이런 걸 수출해서 돈 좀 벌지. 왜 이리 가난하게 살았누."

"그러니까 탈북해서 한국에 들어온 사람이 사만 명에 가깝지."

날이 갈수록 송이밭은 속수무책 망가졌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나도 적극적으로 가담했습니다. 눈에 자꾸만 밟히는 아내와 아내를 연상시키는 그녀를 잊기 위해 나는 남보다 더 우악스럽게 송이밭을 짓밟았을 겁니다. 송이는 염장되어 다음해 봄까지 우리들의 코와 입을 즐겁게 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가을이 되었을 때 송이밭에서는 송이 향이 풍겨 나오지 않았습니다. 어쩌다가 하나를 발견하면 숨겨 놓고 혼자서만 먹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그녀의 당부를 상기했지만, 애초부터 송이가 거기 없었다는 듯 서로 자신들을 책망하는 말을 입 밖에 꺼내지 않았습니다.


이 정 :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다. 2010년 <계간문예>로 등단했다. 경향신문에서 민족네트워크연구소 부소장을 지냈다. 현재 통일문학포럼 상임이사, 사단법인 공정세상연구소 소장, 6.15민족문학인남측협회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국경>(문체부 우수도서), <압록강블루>(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수혜작), <기억>이 있고, 단편소설집 <그 여름의 두만강>이 있다. 북한을 여러 차례 다녀왔다. 북한과 북한사람들에 대한 소설을 주고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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