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박경리 토지길, 섬진강 따라 소설 속 주인공 된다.

산업1 / 토요경제 / 2010-03-29 09:55:24

경남 하동
섬진강을 따라가는 박경리 토지길
꽃 마를 날 없는 황금빛 섬진강길


‘섬진강을 따라가는 박경리 토지길’이란 소설 ‘토지’의 주 무대가 된 하동을 걷는 도보여행코스이다. 총 31km로 ‘토지’ 실제 배경이 되었던 평사리를 지나는 1코스 18km와 19번 국도를 따라 꽃길을 걷는 2코스 13km로 나눠진다. 두 코스 거의 모든 구간에서 섬진강이 보이는 것은 물론이다. 섬진강이 내내 길동무를 해주고 곳곳에 ‘토지’와 녹차에 얽힌 이야기들이 남아 있어 걷는 동안 한눈 팔 겨를이 없다. 특히 벚꽃이 필 무렵에 가면 진해와 여의도 벚꽃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멋진 화개길 벚꽃이 기다린다.



하동하면 재첩, 재첩하면 하동이라고 하는 것도, 넓은 평사리들판을 배경으로 3대에 걸친 이야기 ‘토지’가 쓰여진 것도 섬진강 때문이다. 섬진강 민물과 광양만 바닷물이 만나 만드는 진국 재첩은 시원한 국물이 되어 헛헛한 속을 달래고, 25년 집필 끝에 완성된 박경리 선생의 이야기는 하동을 찾는 여행자들의 마음을 빼앗는다. 하동포구 80리길. 광양만으로 젖어드는 섬진강의 애잔한 모습은 이 80리 끝자락에 있다. 드라이브 좀 좋아한다는 사람들이 입에 침이 마를 때까지 칭찬하는 19번 국도를 타면 섬진강 꼬리를 따라 하동으로 들어간다. 꽃이 마를 날이 없다는 길 위, 이곳에서 내려다 본 섬진강은 꽃만큼 아름답다. 볕을 받은 강물이 너울질 때마다 섬진강은 황금빛 실처럼 길게 몸을 튼다. 박경리 선생은 이 강처럼 눈부신 이야기를 실처럼 풀어냈다. 여행자에게 이 강은 어떤 이야기를 풀어놓을 것인가. 섬진강과 토지의 고을은 강보다 맑고 땅보다 넓은 이야기를 준비한다.



소설 ‘토지’의 무대 따라 걷는 길
용이와 월선이가 버선발로 뛰어나올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고


섬진강 덕분에 하동은 언제 찾아도 처음 찾았을 때와 꼭 같다. 한결 같은 강물이 그렇고, 그 강물에서 장난치는 아이들이 그렇다. 강이 지척인 평사리 공원으로 들어간다. 입구에서 삐죽 고개를 내민 장승 한 무리가 반긴다. 입을 동그랗게 하고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잡는다. 한때 섬진강 위를 누볐을 나룻배가 강물이 아닌 잔디밭에 앉아 강을 바라본다. 서희도 용이도, 월선이도 탔을 법한 그런 배이다. 그 아래로는 넓게 펼쳐진 섬진강 모래밭이 강물처럼 반짝인다.
때도 아닌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무릎까지 바지를 걷고 강바닥을 헤집는다. 강물 아래로 모래가 일어나는 것이 보일 정도로 물빛이 단아하다. 공원 건너편으로 보이는 것이 만석꾼 최참판댁의 평사리 들판이다. 계절마다 꽃이며 보리가 강물처럼 일렁인다. 그 위로 섬진강에서 피어 오른 운무가 앉으면 강물은 어느새 바다처럼 끝을 모른다. 지나가는 길에 들판 한 가운데 소나무 두 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예전에는 섬진강 위에 떠 있던 섬이었단다. 주변이 간척되어서도 여전히 섬처럼 남았다. 하동에는 ‘중국 악양만큼 아름답다’하여 악양의 지명들이 붙은 곳이 많다. 동정호가 그 중 하나. ‘동정추월(洞庭秋月)’이라는 말처럼 동정호 위로 가을 달빛이 잦아들면 사방이 고요해질 만큼 환상적이었을까. 지금은 늪이 되어 과거의 모습을 잃은 지 오래지만 대신 늪이 된 동정호 위로 철새가 날아들며 달빛 이상의 풍요로움을 남긴다. 동정호 저 만치로 형제봉이 우뚝하다. 잦은 발길에 시멘트처럼 딱딱해진 흙길을 따라 올라간다. 1시간 남짓 걸어야 고소성이다. 찍어낸 듯 반듯반듯한 돌들이 벽을 이루고 길을 만든다. 아래쪽으로 지나왔던 평사리 들판부터 섬진강변, 동정호가 내려다보인다. 적당한 나무그늘에 앉아 달게 휴식을 취하며 그 경치를 바라보면 성을 지나 온 바람이 나지막이 귓가를 스친다. 고소성에서 내려오면 들판 끝자락이다. 내려오자마자 아스팔트로 된 오르막길을 걸으면 최참판댁이 보인다. 오르는 길 옆으로 ‘토지’속 인물들이 살던 초가도 보인다. 금방이라도 문을 열고 쪽진 머리의 아낙이 나올 것 같다. 소소한 소품들마저 누군가 오래 쓴 것 마냥 손때가 묻어 있다. 긴 시간 혼을 쏟아 써 내려간 작품은 이곳에서 숨을 얻어 현실이라는 벽을 허문다. 초가집 마을을 지나자 기와집이 나온다. 이리 오너라. 이곳을 찾은 여행자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외친다. 뛰쳐 나오는 머슴 없어도 대문 안쪽으로 들어서니 옛 이야기 그대로이다. 방마다 소박하면서도 기품 있는 가구들이 주인의 손길을 기다린다. 신발만 벗으면 대청에 오를 수 있다. 사랑방 마루에 앉으면 평사리 들판과 섬진강이 보인다. 평사리를 지나 악양면사무소를 지나면 조부잣집이라고 불리는 조씨고가가 나온다. 실제 최참판댁의 모델이 되었다는 곳이다. 어마어마한 식솔과 넘쳐나는 손님들로 늘 밥 짓는 연기가 끊이지 않았다는 곳. 조부잣집 쌀뜨물 때문에 섬진강이 뿌옇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지금은 과거 만석꾼의 자취는 거의 남지 않아 약간의 쓸쓸한 느낌마저 준다.
악양루에 올라 화개로 뻗은 길을 보며 앞으로의 여정을 가늠해본다. 악양루 아래로 구불구불한 강 길의 시작. 길을 따라 걷는 것인지 강을 타고 걷는 것인지 강과 길은 사이가 좋다. 봄이 되면 꽃부터 피는 곳이라 봄 마중하기 좋은 길이란다. 없는 것 빼고 다 있다는 화개장터 가는 길은 섬진강과 함께이다. 걸어왔던 길만큼 화개장터는 볼 것 많은 곳이다. 재첩 고을답게 재첩국의 구수한 냄새는 장의 이 끝부터 저 끝까지 흐른다.



산과 강, 인간이 만든 ‘눈 속에 꽃이 핀 고장’ 화개 길
연인이 두 손 꼭 잡고 걸으면 백년해로한다는 혼례길


이것저것 든든하게 먹고 화개장터를 나선다. 화개삼거리를 지나면 굵직한 벚꽃나무들을 만나게 된다. 촘촘하게 심어진 나무들의 가지는 하늘 아래서 지붕을 이룬다. 십리벚꽃길(혼례길)의 시작이다. 벚꽃이 만발하는 4월이면 사람에 차이고 차가 막혀도 좋은 곳이다. 꽃잎이 눈처럼 날리니 그 아래 서있는 것만으로도 봄의 정취에 흠뻑 젖게 된다. 연인이 두 손을 꼭 잡고 이 곳을 걸으면 백년해로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혼례길이라는 이름도 얻었다. 그래서인지 꽃이 피면 꽃보다 고운 청춘 남녀들이 많이 찾는다. 이 길을 지나 쌍계사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차 재배지가 나온다. 지리산 녹차는 말이 필요없을 정도로 맛이 뛰어나다.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차나무를 키웠다는 자부심도 은연중에 묻어난다. 초록색 물결이 이리로 한 번 저리로 한번 넘실대면 코 끝으로 싸한 차 내음이 밀려온다.
쌍계사로 접어드는 길은 군더더기 없이 담백하다. 말끔하게 정돈된 길이며, 한쪽으로 흐르는 계곡까지 어느 하나 흠 잡을 것 없이 청아하다. 입구에서 오랜 찻집이 친구마냥 여행자를 반긴다. 직접 담갔다는 대추차는 쌍계사를 오르는 또 하나의 즐거움. 목마름도 피로함도 차 한 모금에 씻어 버리고 남은 여정을 시작한다. 쌍계석문바위를 지나 천천히 산책하듯 걷는다. 꾸밈없이 무뚝뚝한 서체가 최치원 선생의 성품을 보여준다. 뒤로는 갖은 멋을 부려 쓴 이완용의 서체도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몰래 똥을 가져다 부었다 하여 ‘똥돌’이라 부른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전해진다. 흐르는 계곡에 옛 이야기 흘려보내고 여행자는 부처의 세계로 들어간다. 일주문과 금강문을 지나며 속세의 더러움은 잊는다. 천왕문까지 지나자 늘씬한 석탑이 보인다. 단아하게 놓인 가람들이 아늑하다. 사람 많은 경내지만 볕이 쏟아지는 모습은 한가롭다. 대웅전부터 명부전까지 두루 둘러본다. 쌍계사를 나와 오르고 또 오른다. 약간 비탈진 길은 나무 그늘 아래서 나타났다 숨었다를 반복한다. 3km 정도 올라가면 폭포가 나타난다. 불일폭포이다. 산속이라 바깥 세상 소리는 들어오지 않는다. 단지 폭포수가 바위 위로, 나뭇잎 위로 떨어지는 소리뿐이다. 비가 온 뒤라면 물줄기는 평소보다 거칠어 옆 사람 말조차 들리지 않는다. 약간 급한 경사길이 등을 떠밀어 불일암을 지난다. 이곳에서 희미한 백운산 자락을 올려다 본다. 폭신한 흙길을 따라 봉명산장을 지나고 국사암으로 움직인다. 암자 일주문 앞에는 1,200살이나 된 느릅나무가 있다. 사천왕수라 불리는 이 나무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진감선사의 지팡이였다 한다. 진감선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땅에 꽂자 지팡이에 싹이 나며 나무로 자랐단다. 굵은 가지가 네 방향으로 자라나 그 모습이 독특하다. 국사암에는 사천왕수와 함께 연꽃 연못이 주인이다. 여름이면 연못 사득 색색의 연꽃들이 피어난다. 연꽃이 없어도 연잎으로 덮여 있는 연못은 고즈넉한 아름다움이 있다. 물끄러미 연못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하루 여정이 끝났음이 느껴진다. 산 속은 해가 빨리 지는 법, 속세로 서둘러 내려간다.
4월이 되면 전국 방방곡곡 봄을 맞은 벚꽃이 지천이다. 섬진강변 박경리토지길을 걸으며 벚꽃과 매화가 주는 따뜻한 봄의 정취를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연인이 있다면 손을 꼭 잡고 혼례길을 걸으며 벚꽃눈을 맞고, 그렇지 않다면 책 한권 들고 예스러운 마을에서 여유를 가져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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