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팀] 화면 가득 청보리밭이 물결처럼 출렁인다. 중앙에는 과감한 자세로 드러누운 발가벗은 여체가 자리하고 있다. 한국적 보리밭의 에로티시즘을 표현한 이숙자(70)의 그림 속 풍경이다. 보리밭은 싱그러운 초록부터 황금, 청, 은, 보라색 등 다양하다. 특히 바람에 물결치는 보리는 풍부한 색조를 발산한다.
보리밭과 함께 한 지 40여 년이 된 이씨가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이숙자의 색채 여정’이란 제목으로 5년 만에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보리밭과 함께 주목한 여체는 대담하다 못해 적나라하기까지 하다. 여성은 큰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거나 보랏빛 머릿결을 흐트러트리고 있다.
1970년대 후반부터 보리밭을 그려온 작가는 1989년 ‘이브의 보리밭’ 시리즈를 시작했다. “이브의 보리밭은 우리 겨레의 보리밭 에로티시즘을 전제로 해서 그린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브의 보리밭’은 보리밭과 결별한 작가가 다시 보리밭을 그리면서 탄생했다. “1980년 보리밭으로 국전에서 대상을 탄 후 따라붙은 ‘보리밭 작가’라는 별명이 싫어 1983~1984년에 보리밭을 그리지 않겠다고 고민했다”며 “‘보리밭과 황소’를 마지막으로 보리밭과 결별하고 민족적 정서가 느껴지는 소를 그리기로 마음먹었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보리밭에 미련이 남아 다시 시작한 작업이 보리밭과 여체를 결합한 ‘이브의 보리밭’”이라고 밝혔다.
지금은 “보리밭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을 잘했다고 생각한다”며 웃었다. “보리밭을 제작하는 것은 육체적으로 고되지만 작품생활에서 오는 압박감이나 긴장, 불안 등 작업스트레스를 잊게 해주고 마음의 안정을 얻게 해준다”는 것이다.
과감한 포즈를 취한 보리밭의 전라 여성은 “에로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마음속의 자화상이랄까.”
요즘은 모델을 보고 크로키를 한 뒤 포즈가 좋으면 데생에 들어간다. 부분적으로 자신의 몸을 보고 그리기도 한다. “형태가 변한 몸을 스케치했더니 처절한 노년의 누드가 됐다. 늙은 모습이 싫어 허리도 부드럽게 주름을 없앴고, 얼굴은 젊은 사람으로 바꿨다”고 귀띔한다.
나이 탓에 몸은 예전 같지 않다. 4년 전에는 자주 쓰는 오른쪽 손목 인대에 이상이 생겼다. 작가는 지난해 초 몸이 괜찮아진 후부터는 조금 더 편하게 그릴 수 있는 꽃과 누드를 중심으로 작업하고 있다.
“체력의 한계를 느껴 앞으로 보리밭을 계속 그릴 수 있을지, 몇 점이나 더 그릴 수 있을지 가늠하기 어렵다”며 “비교적 육체적으로 덜 고되고 그릴 때마다 내가 활력을 얻고 보는 이들도 생명력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시장에는 자연의 생명력을 보리 낱알 하나하나를 통해 감각적으로 드러낸 ‘보리밭’ 시리즈를 비롯해 ‘이브의 보리밭’ 시리즈 등 회화 40여점과 크로키 30여점을 걸었다. 4월1일까지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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