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 거듭하는 서양화가 배태주 ‘트라우마’ 시리즈

문화·라이프 / Maria.Kim 칼럼니스트 / 2023-05-27 20:39:19
"지치고 상처받은 영혼들에게 치유의 계기를 마련하고파"
구체적 대상 묘사부터 무한 반복 패턴까지 다양한 접근
"트라우마와 연계한 더 다양한 방식으로 이어가려"

“자 이제 구슬을 입안에 전부 넣으십시오. 자 발음해 보세요. 전하 집중하세요!” 영화 ‘킹스 스피치(The King's Speech, 2011)’ 中

긴장한 채 단상 위에서 입을 떼지 못하는 한 남자. 결국, 침묵을 깨고 연설을 시작하지만, 그의 어눌한 말은 이내 멈추고 만다. 관객 가운데 어떤 이는 눈을 질끈 감고, 또 어떤 이는 침을 꿀꺽 삼키고 만다.

그는 사실 조지 6세로 불리는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의 왕 겸 인도 제국의 황제’다. 대영제국의 황제이지만, 그는 어린 시절 유모의 학대와 강압적인 부친의 영향으로 ‘말더듬이’가 됐다. 흔히 말하는 ‘트라우마’가 생긴 것이다.

트라우마(Trauma)는 일반 의학용어로 '외상(外傷)'을, 심리학 용어로는 '정신적 외상'을 말한다. 이런 트라우마 환자는 ‘외상’을 입은 과거와 비슷한 환경에 다시 처하게 되면 불현듯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큰 혼란에 빠지기도 한다.

영화는 이런 조지6세의 트라우마 탈출기를 그리고 있다. 물론 결말은 해피엔딩이다. 주인공 조지6세는 가족과 지원자의 노력에 힘입어 결국엔 황제다운 완벽한 연설을 하게 된다. 그 순간 그는 평생 자신을 옭아맸던 모든 트라우마를 내려놓게 된다.
 

▲ '트라우마' 시리즈, 서양화가 배태주

 

서양화가 배태주는 이런 ‘트라우마’를 주제로 작품활동을 펴는 아티스트다. 그래서인지 그는 "저는 인간의 트라우마를 다루는 작가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의 ‘트라우마’ 시리즈는 벌써 여러 전시 무대에 섰다. 특별한 주제의 작품에 관객과 비평가들은 호평을 이어가고 있다.

그의 이런 작품세계는 어떻게 시작됐을까. 그는 “누구나 작든 크든 트라우마를 안고 산다. 나도 짊어진 트라우마가 있다. 나의 작업은 나의 트라우마 탈출기다. 앞으로도 더 다양한 방식으로 관련 주제를 이어가고 싶다”고 했다.

이 트라우마 시리즈는 해를 거듭하며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우선 주목할 작품들은 이 시리즈의 초기작에 해당하는 ‘수술 바늘에 걸린 상처’ 시리즈다. 이 시리즈는 독특한 주제와 그의 도전적인 표현이 관객의 허기진 배를 채울 만하다.

▲ ‘수술 바늘에 걸린 상처’ 트라우마 시리즈

 

캔버스 위엔 입 모양으로 찢긴 상처가 있다. 상처 주변엔 수술 바늘이 꽂혀 있다. 모두 봉합하고 시간이 지나면 상처는 자연스레 아물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아직 상처를 봉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상처 속에 꼭 다문 빨간색 입술을 그려 넣었다. 어찌 보면 영화 ‘킹스 스피치’에서 자유자재로 말하지 못하는, ‘트라우마’에 갇힌 조지 6세를 소환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 작품이 이런 트라우마의 한 단면이나 상황을 연출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이 작품에서 배태주 작가는 먹고, 마시고 말하는 욕망의 분출 기관인 ‘입’을 그려 넣는 것으로 인간 누구나의 잠재의식 속에 숨겨진 트라우마에 대한 화두를 관객에게 던지고 있다. 이 빨간 입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어 침묵하는 ‘입’인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트라우마를 입히려는 잔혹한 ‘입’인지는 관객 상상의 몫이다. 어쨌든 그림 속 입은 누군가와 분란을 일으킬 수도, 화해를 이끌 수 있다.

또 다른 작품에 찢긴 상처 속엔 푸른 눈빛이 등장한다. 관찰차처럼 보이는 이 눈은 어떤 눈일까. 전능한 신처럼 모든 것을 다 아는 듯 관객을 응시하는 것일까 혹은 트라우마에서 탈출하기 위해 눈을 부릅뜬 것일까. 역시 해석은 관객 몫이다.

이런 배 작가의 ‘수술 바늘에 걸린 상처’ 시리즈는 개별 작품이 주는 여러 상상력과 더불어 시리즈 자체의 공통분모인 ‘트라우마’가 주는 개인마다 사정에 따라 여러 시선이나 해석을 낳을 수 있어 수작으로 꼽힌다.

그렇게 배태주는 두려움을 떨치고 자신의 트라우마와 맞서고 있다. 기억 저편에서 오물처럼 쌓인 그것들을 그는 작품 속에서 승화하고 있다. 이는 어쩌면 과거에서 벗어나 무아를 향하는 작가의 과정적 실존으로도 읽힐수 있다. 가식을 벗어던진 헐벗은 존재처럼. 잎이 모두 떨어진 나무처럼 작가는 그렇게 트라우마를 내려놓고 있다.

▲ Trauma-wave Acrylic on canvas. 53.0*45.5cm 2023

 

▲ Trauma-Wave Acrylic on canvas. 72.7*121.2cm 2022.5.26 ‘수 많은 주름들이 퇴적된 삶이라는 물결~’

 

조지6세의 치료를 도운 이도 어쩌면 기억 저편엔 저만의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내려놓고 조지6세를 전지적 시점에서 관찰하고 조력한다. 물론 누구나 그 트라우마를 내려놓거나 넘어서는 것은 자신의 몫이다. 배태주 작가의 마치 킹스스피치의 조지6세의 조력자처럼 자신의 시리즈를 통해 관객의 트라우마를 벗기려 시도하는 지도 모른다.

2011년 부터 현재까지 배태주 작가는 새로운 ‘트라우마’ 시리즈를 선보이고 있다. 전작과 크게 대비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구체적인 대상의 묘사로 ‘트라우마’에 대한 화두를 던진 것이 전작 시리즈 였다면 이번 시리즈는 무한 반복에 가까운 패턴으로 단순 명료하게 주제를 건드리고 있다.

이번 새로운 시리즈는 작품마다 캔버스 전체가 한가지 톤으로 느껴지게 한다. 하지만 실제는 여러 색이 덧씌워졌다. 다가설수록 묘한 느낌을 준다. 특히 강한 마띠에르, 즉 질감은 평면의 화폭을 한순간 3차원으로 일으켜 세운다. 서로 다른 칼라로 무한 반복된 패턴화 된 이 ‘트라우마’ 시르즈는 전작과 다른 또 다른 배태주를 만나게 한다.

▲ Trauma-도시의 눈물 145.5*112.0cm. 2011년도

 

혹자는 이런 그의 품을 ‘단색화’로 단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본질을 꿰지 못한 헛발이다. 본질로 가가서는 물성의 해석과 붓터치는 기존의 ‘단색화’와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특별함은 그가 오랫동안 이어온 물성에 대한 이해나 실험에서 나왔다고 봐야 한다.

▲ Trauma-도시의 눈물. 162.0*130.3cm. 2011년도

 

“일상을 살아가는 도시인들의 삶을 그립니다. 일상의 트라우마. 도시의 눈물, 도시인들의 눈물과 아픔을 작업주제로 하여 작업을 하고 있고, 경쟁 사회에 지치고 상처받은 영혼들에 치유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 작업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서양화가 배태주의 작가노트 中

 

토요경제 / 마리아김(Maria.Kim) 문화예술 칼럼니스트, kimjjyy1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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