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 작가의 단편소설] 시인의 귀향

기자수첩 / 토요경제 이정 작가 / 2021-05-26 10:32:07

시인의 귀향 - 1

밤새 눈이 내렸습니다. 차창 밖 산들이 새하얗게 빛납니다.
플랫폼 주변에 늘어선 금강송들의 팔과 머리 위에도 눈이 두텁게 쌓였군요. 금강송들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모양샙니다.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여정이 되었다는 확신이 섭니다. 시야처럼 가슴도 후련하게 트입니다.
어제와 연결된 오늘이 아니라 전혀 다른 새날을 맞은 기분이 듭니다. 금강송 가지에서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깡총거리며 우짖는군요.

쫑 쪼르릉, 쫑 쪼르릉…….

창에 가로막혀 들릴 리 없지만, 내 마음은 마냥 정겹게 새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플랫폼 가운데에 선 이정표에 평양까지 261km라고 쓰여 있네요. 여기 도라산역에서는 고작 40분 거립니다. 그런데도 평생을 기다려온 시간 중 마지막 남은 몇 분처럼 지루하군요.
그녀는 소식 돈절된 다섯 해 동안 머릿속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던 사람입니다. 어떻게 변했을까? 이젠 30대 후반이 되었겠지만, 내 기억 속에는 신호 불량으로 끊긴 TV 화면처럼 다섯 해 전 모습으로 정지돼 있습니다. 나를 원망하지나 않았을까? 불쑥 나타난 나를 보고 뭐라 말할까? 하긴 기다리라는 말도, 기다리겠다는 말도 서로 한 적이 없이 헤어졌습니다. 걱정이 살짝 설렘을 누릅니다.

"모스크바까지 가는 우리 열차, 30초 후에 출발합니다. 입경수속에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내방송이 정적을 깨네요. 서울역을 출발한 이 열차는 북쪽 지역으로 민간인을 태우고 가기 시작한 지 서른세 번째 날의 초고속열찹니다.
넉 달 전, 남북한은 이미 합의한 절차대로 코리아연합이란 이름으로 통행, 통관, 통신을 자유롭게 하는 첫 단계 통일을 시행했습니다. 비로소 북한의 비핵화가 완성되었다고 미국이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이 열차를 타기 위해 나는 3일 동안이나 스마트폰에 고개를 처박고 모질음을 썼습니다. 열차티켓 예매 앱은 접촉 폭주로 먹통이 되기 일쑤였습니다. 코리아연합 정부는 승객 수송용으로 하루 다섯 편의 열차만 허용하고 있습니다. 쌍방의 혼란을 피하기 위한 조치랍니다. 특히 연합 정부는 투기를 위해 남쪽에서 북쪽으로 가려는 사람들의 통행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조치가 사람들에게 돈벌이와 열차 티켓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만들 뿐이었습니다. 결국 오늘의 이 열차 티켓을 쟁취한 내겐 세상에 이런 행운이 따로 없었습니다. 회사 근처 절에 가서 부처님께 절을 올리는, 안 하던 짓까지 했지요. 연이은 행운을 기대하면서.

옆 자리에 앉은 탈북자 도 선생은 창밖을 하염없이 내다보고 있군요. 흥분을 그런 식으로 가라앉히는가 봅니다. 고향 떠난 지 12년 만에 가족을 만나러 간다는군요.

뿌우웅, 뿌우웅.

승객들의 북측 지역 입경수속을 끝낸 열차가 기적을 울립니다. 천천히 플랫폼을 뒤로 밀어냅니다. 선반에 올라앉은 각양각색의 짐 꾸러미들이 움찔 움직이는 소리를 냅니다. 지나치는 풍경의 속도에 맞춰 내 호흡이 덩달아 가빠집니다.


이 정 :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다. 2010년 <계간문예>로 등단했다. 경향신문에서 민족네트워크연구소 부소장을 지냈다. 현재 통일문학포럼 상임이사, 사단법인 공정세상연구소 소장, 6.15민족문학인남측협회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국경>(문체부 우수도서), <압록강블루>(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수혜작), <기억>이 있고, 단편소설집 <그 여름의 두만강>이 있다. 북한을 여러 차례 다녀왔다. 북한과 북한사람들에 대한 소설을 주고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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