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독재에 눈 감는 것은 민주주의 배신”

오피니언 / 유상석 / 2013-05-06 09:49:03
인물포커스 - 하태경 새누리당(부산 해운대기장을) 의원 (130)

[토요경제=유상석 기자] 지난 3월12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 주재 북한대표부 앞. 피켓을 든 사람들이 북한인권 개선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이 가운데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제22차 유엔인권이사회(UNHRC)에 참석해 회원국을 대상으로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 설립을 촉구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는 하태경(새누리당ㆍ부산 해운대기장을)의원이었다. 북한인권운동을 꾸준히 벌여 온 그는 “북한 독재에 눈을 감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배신”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노력이 결실을 거둬, 유엔인권이사회는 마침내 3월 21일 북한 인권조사기구 창설을 골자로 하는 북한인권결의안을 채택했다.


◇ 중국서 새터민 만나면서 분노 느껴

하태경 의원은 ‘북한 인권운동 1세대’로 꼽힌다. 그는 지난 2005년부터 대북 라디오 방송인 ‘열린북한방송’을 운영하면서 외부 소식을 북한에 전해왔다. 한때 하 의원은 강성 ‘운동권’으로 통일 운동을 주도했다. 학생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두 차례나 투옥을 당했고, 고 문익환 목사가 주도하던 ‘통일맞이’라는 단체에서 활동했다. 때문에 그는 “전향한 것이냐”는 따가운 시선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전향한 것이 아니라 80년대나 지금이나 동일한 가치를 위해 운동하고 있다”고 답했다. 달라진 게 있다면 그 대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광주항쟁에서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신군부 체제에 대한 분노 때문에 80년대 학생운동이 시작됐던 것처럼, 북한인권운동도 인권을 유린당하는 북한 주민들에 대한 동정과 북한 독재체제에 대한 분노에서 시작된 것”이라는 하 의원은 “학생시절 그랬듯, 지금도 분노하며 실천하고 있다. 운동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 의원과 함께 일했던 문익환 목사는 지난 1994년 1월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문 목사의 죽음은 그가 주사파와 갈라진 하나의 계기가 됐다. 그는 “범민련 북측 본부에서 ‘문 목사는 안기부의 프락치’라는 팩스가 왔다. 북측과 다른 주장을 한다고 해서 ‘프락치’로 모는 상황을 보고, 북한의 실체를 뼈저리게 느꼈다”고 회상했다.

이후 그는 고향인 부산으로 돌아가 영어강사로 일하면서 지친 심신을 달랬고, 장춘의 길림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북한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그는 북한과의 접경에 위치한 대학에 유학을 가려 했지만, 장학금 혜택을 받으려면 일류대학인 중국의 ‘중점대학’을 가야 했기에 길림대를 택했던 것이다.

중국 유학시절, 그는 선교사나 새터민(탈북자) 지원단체 등을 통해 무수히 많은 새터민들을 만나면서 그는 “분노를 느꼈다”고 했다. 그것은 학생운동 시절, 광주항쟁의 희생자들을 보며 솟구쳤던 분노 그 이상의 것이었다. 초심(初心)이 다시 타오르는 듯했다. 북한의 변화를 위해 뭔가 해보겠다는 결심이 섰다.

무엇보다도 이 참혹한 실상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 급선무였다. 새터민들과의 인터뷰를 여기저기 기고했다. 새터민들과의 인터뷰 중에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북한에 화형(火刑)제도가 있다는 것이었다. 새터민 중에서 특히 몸 파는 여자들을 화형에 처한 적이 있다는 증언이었다. 그가 만났던 새터민 중에는 10대 소년도 있었다. 탈북 과정에서 중국 조폭에 끌려가는 바람에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혹독한 구타를 당했다고 했다. 하 의원은 그에게 이메일 쓰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소년은 한국에 들어와 대학도 다니고 지금껏 잘 지내고 있다. 하 의원이 만들어준 이메일을 쓰면서 말이다.


◇ 미 의회 예산 지원 받아 ‘열린북한방송’ 만들어
하태경 의원은 잠시 SK텔레콤 북한사업팀에서 일하기도 했지만, 2005년 사표를 냈다. 고액 연봉을 받던 직장을 그만두고, 미국으로 떠난 그는 미국 민주주의연구소의 레이건 펠로우십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북한의 민주적 변화’를 연구 주제로 잡았다. 그러면서 북한 사람들에게 북한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북한으로 내보내는 민간 라디오 방송을 꾸릴 방법을 찾았다.

처음에는 라디오 방송국을 만든다는 것이 불가능하게만 보였다. 하지만 미국에는 상업주파수가 있어, 돈만 내면 방송주파수를 임대할 수 있었다. 문제는 돈이었다. 그는 재정지원을 받기 위해 백악관, 의회, 국무부를 쫓아다니며 로비를 했다. 결국 미국 의회 예산을 지원받는데 성공했다. 한국인이 예산을 곧바로 받을 수는 없어, ‘미국 민주주의기금’이라는 단체를 통해 지원을 받았다. 그렇게 해서 2005년 12월 8일, ‘열린북한방송’이 처음 전파를 탔다.

사실 그가 민간 대북 방송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90년대 후반 중국 연변에서 꽃제비(먹을 것을 찾아 떠도는 탈북한 어린이들을 지칭하는 말)들을 만나면서부터다. 꽃제비들에게 고기 국밥을 사줬는데 하나 같이 고기를 먹지 않고 국물만 먹었다. 평생 고기를 먹어본 적이 없어 소화가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하 의원이 김정일을 비난하는 말을 하자 아이들은 “왜 장군님을 욕하느냐”면서 그에게 대들었다고 한다.

그 때 그는 ‘닫힌 사회’에서 받는 세뇌교육의 위험성을 처음 느꼈다. 북한을 바꾸려면 우선 북한 사람들이 정보를 접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대북방송을 생각해낸 것은 그즈음이었다. 이후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북한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을 한국 인터넷으로 보도하는 ‘열린북한통신’도 만들었다.


◇ 북한 인권 문제로 세계와 만나다
지난 2000년 하 의원은 북한 인권 문제로 제네바 유엔 인권위원회에 참석했다. 북한 인권 실태를 고발하면서 마지막에 “이 모든 원인은 김정일에게 있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북측 대표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삿대질과 욕을 했다. 북측 인사들은 ‘수령님 이름만 좀 빼 달라!’고 했다. 하 의원은 “북한은 국가라기보다 수령을 보스로 하는 일종의 마피아 집단 같았다”고 했다.

하태경 의원은 북한 인권운동과 관련, 두 가지 목표를 위해 뛰고 있다고 했다. 하나는 북한인권법을 국회에서 통과시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민간 대북방송 진흥을 위해 주파수를 제공해주는 일이다. 그가 애타게 바랐던 ‘유엔 북한인권조사위’는 3월 21일 유엔인권이사회에서 북한인권결의안을 채택함으로써 이뤄지게 됐다. 그는 “맹목적 반미주의와 종북주의는 결코 진보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강성 운동권에서 인권운동가로, 그리고 국회의원이 됐지만, 그가 꾸는 꿈은 달라지지 않았다.


◇ 하태경 의원은
1968년 부산 출생. 서울대 물리학과에서 학사, 고려대 국제대학원에서 석사, 중국 길림대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SK텔레콤 경영경제연구소 수석위원으로 근무하기도 한 그는 지난 2005년부터 2011년까지 열린북한방송 대표로 활동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국회의원이 된 후에는 국회 농림수산식품위원회 위원, 새누리당 북한인권 및 탈ㆍ납북자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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