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칼럼]보호할 가치가 있는 혼인관계

오피니언 / 정해용 / 2009-12-07 10:52:21

여든 가까운 할머니 동창생들이 풍광 좋은 찻집에 앉아 이야기를 나눕니다.
한 달 만에 만나 그동안 지낸 일을 얘기하고 오랜만에 참석한 친구들과 오래 묵은 소식들을 주고받습니다. 이제는 죽은 친구에 대한 회상을 나누고 미국에 사는 친구의 소식도 듣습니다. 한 할머니가 벌써 몇십년째 소식만 전해오는, 친구의 편지를 꺼내 모두에게 읽어줍니다. 할머니들은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창밖으로 눈길을 돌리기도 하면서 조용히 듣습니다. 마치 한 편의 시를 펼쳐놓고 강독회라도 갖는 것 같습니다. 편지 읽기가 끝나자 할머니들은 한숨을 쉽니다. 한 할머니가 말합니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이건 하소연도 아닌 것 같고, 도와달란 얘기도 아닌 것 같고.” 아마도 사는 게 즐겁지 않거나 문제가 있다는 내용이었던가 봅니다.



할머니들은 테이블에 놓인 ‘그 옛날 다방식 커피’를 조심스럽게 마십니다. 이제는 커피 한 잔에서 오는 불면의 위험이라든가 위장에 대한 자극 같은 것을 섬세하게 예측할 수 있게 된 것이 분명합니다.
할머니들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어느 친구의 아들 장례식에 대한 이야기도 나눕니다.
“무자식 상팔자야.”라고 한 할머니가 탄식하고, 그래도 자식이 있으니까 얼마나 든든하게 살고 있느냐고 다른 할머니들이 반박합니다. 어떤 할머니에게 가족이 있는지, 자손이 있는지, 있다면 그들에게 빛인지 그늘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창밖으로는 바람이 붑니다. 이층 창가에 딱 맞춤하게 펼쳐진 가로수 가지들이 흔들리고 잎새들이 춤을 춥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습니다.
조간신문에는 ‘혼빙간음죄 위헌’이라는 활자가 큼지막하게 실려 있습니다.
잠시, 가족에 대해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가족은 결혼에 의해 시작이 됩니다. 독립된 성인 한 사람은 가족이 될 수 없지만, 배우자와 만나 부부가 되면 거기서부터 가족이 시작됩니다. 빛이 되기도 하고 그림자가 되기도 하는 가족입니다. 세상 모든 인연에는 만나고 헤어짐이 있다 하지만, 만나고 헤어짐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가족입니다.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남이 될 수 없는 관계라고 할까요.



가족은 현대의 대다수 나라에서 채택하고 있는 사회 정치제도 가운데서 최소 단위의 사회입니다. 가족들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지방의 체제를 이루고 나아가 국가를 지탱합니다. 언젠가부터 사회체제를 이끄는 지도자들은 이 가족제도와 가족들이 이루는 가정이란 단위를 잘 보호하는 것이 중요함을 깨달았고, 이를 위해서 가족 단위를 보호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규약들을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역사는 꽤 오래된 것 같습니다. 그런 약속들이 법이라는 이름을 갖기 이전부터 마을 공동체 안의 향약이라든가, 신의 계시형태를 지닌 종교적 계율이나 도덕율 등으로 가족 단위를 보호하기 위한 조항들을 넣어둔 까닭일 것입니다.



5천년이나 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 율법들에 바로 가족과 관련한 조항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루고… 이것을 사람이 갈라놓지 못할 것이며’라는 조항을 비롯하여, 남자와 여자가 함께 살 것을 권하거나 부부가 된 남녀를 쉽게 갈라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들이 인간의 문명과 함께 오래도록 유지되어 온 것입니다. 동양에서는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과 같은 윤리법으로 이 가족제도를 지켜왔습니다.
그런데 모두 아다시피, 요즘 가족제도는 전통적인 절대불가분의 관계가 더 이상 보장되지 않는 위기의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자식들은 성인이 되기 무섭게 학업을 이유로, 취업을 이유로, 또는 부모와 성격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족을 떠나갑니다.



그래도 부모자식 관계는 떼어지지 않는 것이니, 가족 해체라 하더라도 그리 영구적인 해체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부관계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헤어진 뒤에라도 ‘아기 아빠’ ‘아기 엄마’라는 관계로 이어져 좀체로 인연이 완전히 지워질 수 없겠지만, 피가 섞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교적 쉽게 남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혼 경험자는 4~5명의 형제가 있다면 그중 한둘은 찾아볼 수 있을 만큼 흔합니다. 그래서인지 주례자들은 이제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라든가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이란 대목에 힘을 주지 않습니다. 듣는 사람들도 부부가 함께 늙어가라는 것은 권장사항일 뿐 의무사항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런 시류에 따라 법도 바뀌어가는 것이겠지요. 이혼한 여성들도 법적 사회적 차별을 받지 않고 당당히 자기 자식을 키울 수 있도록 호적제도가 사라졌고, 엄마와 함께 사는 자식이 엄마 姓을 선택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혼빙간음죄 역시 결혼제도와 관계있는 제도입니다만, 그것이 있어서 결혼제도가 더 보호되고 없어져서 결혼제도가 위태롭게 되었는지는 두고 볼 일입니다. ‘법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절만 보호한다’던 자유당 시절 유명한 카사노바 재판의 판례가 떠오릅니다. ‘법이 보호할 가치가 있는 부부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국민 각자의 책임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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