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식민지배가 합법’이라던 종전 판결 뒤집다

산업 / 유상석 / 2012-06-15 18:18:52
강제징용 피해자 승소 첫 판결 ‘주목’

1944년 9~10월, 한국 청년들이 대거 일본으로 강제징용됐다. 일본 정부는 당시 중일전쟁(1937년)과 태평양전쟁(1941년)을 치르면서 군수물자 생산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1938년 4월1일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한 뒤 1944년 9월부터 국민징용령에 따라 대한민국 국민을 강제징용했다.


이병목(89) 씨도 당시 부산항과 일본 시모노세키항을 거쳐 일본 히로시마로 끌려갔다. 이 씨는 그곳에 있던 미쓰비시중공업 기계제작소와 조선소 노무자로 배치됐다. 이 모든 과정은 일본군과 경찰, 미쓰비시중공업 관계자의 철저한 통제 아래 이뤄졌다.


이 씨는 그때부터 한 달 중 이틀을 제외하곤 매일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철판을 자르거나 동관을 구부리는 일, 배관일 등이 그의 업무였다. 하루 일을 마치면 숙소인 ‘료’로 돌아가 숙식을 해결했으나 식사량과 질은 부실했고, 다다미 12개 넓이의 방엔 10~12명의 노동자가 함께 생활해 제대로 쉴 수조차 없었다. 이 씨의 모든 생활은 감시와 통제로 점철됐다. 숙소 주변엔 철조망이 쳐져 있었고 가족에게 보내는 서신은 사전검열로 그 내용이 제한됐다.


여운택(89) 씨도 비슷한 시기인 1943년 9월 평양에서 오사카제철소 광고를 보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광고는 “제철소에서 2년 동안 훈련을 받으면 기술을 습득할 수 있고, 이후엔 한반도 제철소에서 기술자로 취직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부푼 꿈을 안고 간 ‘원정취업’이었지만 여 씨의 사정도 이 씨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 씨는 주로 화로에 석탄을 넣고 깨뜨려 뒤섞거나 철 파이프 속에 들어가 석탄찌꺼기를 제거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기술 습득’과는 동떨어진 업무였던 것이다. 매일 8시간씩 3교대로 일했고 한 달에 하루 또는 이틀만 외출이 허용됐다. “도망치고 싶다”는 말을 했다가 들통 나 구타와 체벌을 당한 동료를 보면서 감히 도망갈 꿈도 꾸지 못했다.


특히 매월 받는 돈은 2~3엔 정도에 불과했다. 일본제철은 “임금을 모두 지급하면 낭비할 우려가 있다”는 핑계로 여 씨 명의의 계좌로 임금을 강제입금했다. 이후 여 씨는 오사카와 청진, 가마이시제철소 등을 끌려 다니면서 같은 방법으로 임금을 ‘강제 입금’당했다.


그러던 중 1945년 8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이로 인해 일본의 무기 생산라인은 대부분 파괴됐고 강제노역도 중단됐다. 이 씨는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직후 개인적으로 비용을 마련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사회ㆍ경제적 어려움과 피폭 후유증으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여 씨도 일본이 패전하자 귀국길에 올랐으나 그가 ‘강제입금’ 당한 임금은 끝내 돌려받지 못했다.


이들은 이후 일본 법원에 미쓰비시중공업과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일본 법원은 이들의 편이 아니었다. 일본 측은 특히 1965년 한일 정부가 맺은 ‘한일 청구권 협정’(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 해결에 관한 협정) 등을 근거로 보상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한일 청구권 협정은 한국 정부가 ▲3억 달러(무상) ▲차관 2억 달러 ▲민간 상업차관 1억 달러 이상을 제공받는 대신 국민의 ‘개인 청구권’은 포기한다는 내용이 골자다.


이씨는 지난 1995년 히로시마지방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했으나 청구권 협정에서의 ‘소멸시효 완성’ 등을 이유로 1999년에 소가 기각됐고, 일본 최고재판소는 2007년 이 씨에 대한 패소를 확정했다. 여 씨도 지난 1997년 오사카지방재판소에 소를 냈으나 졌고 오사카고등재판소는 2002년 항소를 기각, 상고심 재판부는 2003년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법정 다툼은 한국 법정으로 이어졌다. 이 씨는 일본 법원에 항소한 이듬해인 2000년 5월 한국 부산지법에 “불법행위에 따른 위자료 1억원과 미지급임금 각 100만원을 지급하라”며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소를 냈으나 1ㆍ2심에서 모두 패소했다. 여 씨도 2005년과 2008년 한국 서울중앙지법과 서울고법에 잇따라 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은 그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가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대법원이 피해자의 손을 들어줬다. 이윤재 일제피해공제조합 부이사장과 위안부 할머니들이 판결에 따른 후속조치를 조속히 마련할 것을 정부에 촉구하고 있다.

그러던 중 지난달 24일 이들의 실낱같은 희망이 현실이 되는 역사적인 판결이 나왔다. 한국 대법원이 일본 법원과 한국 1ㆍ2심 법원의 판결을 모두 뒤집고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배상책임을 인정한 것이다. 이로써 광복 이후 68년 만에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보상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대법원 1부(주심 김능환 대법관)는 이 씨와 여 씨, 강제징용 피해자 및 유족 등 10여명이 미쓰비시중공업과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원고패소 판결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부산고법과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한일 청구권 협정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제청 신청은 “협정의 위헌 여부가 재판을 하기 위한 전제는 아니다”라며 각하했다.


재판부는 일본 법원의 판결에 대해 “한국 식민지배가 합법적이라는 것을 전제로 내린 판결”이라며 “이는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으로 본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적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일본 판결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한국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위반한다”며 ‘외국 판결 승인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봤다.


또 당시 법인과 현재의 법인이 ‘동일성’이 없어 채무가 없다는 일본 기업의 주장에 대해 “인적ㆍ물적 구성을 그대로 승계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후(戰後) 처리 및 배상 문제 때문에 동일성이 없다고 하는 것은 한국 공서양속에 비춰 용인할 수 없다”고 밝혔다.


아울러 개인청구권 소멸 여부와 관련해 “청구권 협상 과정에서 국가 권력이 관여한 불법행위에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까지 적용대상에 포함했다고 보기 어렵다”며 “청구권 협정으로 개인 청구권이 소멸되거나 한국의 외교적 보호권이 포기된 것으로 봐서는 안된다”고 판시했다.


이어 “피해자들이 소를 제기할 때까지 한국에서 권리를 사실상 행사할 수 없는 장애사유가 있었다고 봄이 상당하다”며 “일본 기업이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하면서 채무 이행을 거절한 것은 신의성실 원칙에 반하는 것으로 허용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이번 판결은 지난 2009년 항소심 판결이 나온 이후 3년여간의 장고(長考) 끝에 내려졌다. 판결을 이끌었던 김능환 대법관은 퇴임을 두 달여를 앞두고 ‘결단’을 내렸다. 당시 선고가 지연될 때만해도 원심을 뒤집기 힘들지 않겠느냐는 전망이 우세했다. 대법원 선고가 있던 날 사건을 맡았던 변호사들조차 법정에 나타나지 않았을 정도로 ‘기대’가 낮았다.


그러나 김 대법관은 큰 파장에도 불구하고 “법리에 따라 내린 판결”이라며 법과 원칙에 따라 판단했을 뿐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시민단체는 “전범기업에 철퇴를 내린 제2의 독립일”이라며 “사법주권을 다시 세운 날”이라고 환영했다.


또 이번 판결은 일본 최고법원의 판결을 정면으로 뒤집는 것으로 한일 간 치열한 외교전이 불가피해졌다. 민감한 전후 보상 문제인데다 이제까지 신고된 강제징용 피해자가 22만6000여명에 달해 추가 소송이 이어질 경우 배상금이 최대 수백조원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일본 정부는 이번 판결 직후 “개인청구권을 포함해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모두 해결됐다”며 수용 불가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와 기업, 한국 정부의 적극적인 해결 노력을 촉구하며 줄소송을 예고하고 있어 향방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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