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 정부·시장 ‘등 떠밀려’ 기준금리 인하 결정

산업 / 유명환 / 2014-08-23 12:48:41
이 총재 “자의적인 의사 결정 못했다”

[토요경제=유명환 기자] 한국은행이 정부와 시장의 요구에 따라 금리를 인하했다.


지난 14일 한은 금융통화위원회는 올 하반기 기준금리를 2.50%에서 2.25%로 0.25%포인트 낮췄다.


한은은 내수 부진과 소비심리 위축을 인하 배경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금리 인하 결정에 앞서 정부와 정치권의 금리 인하 요구가 쏟아졌기 때문에 한국은행이 ‘정책 공조’라는 이름 아래 정치적 결정을 내렸다는 비판도 나온다.


특히 일부에서는 세월호 참사 여파로 소비가 크게 위축된 상황에서 한은이 독자적 판단에 따라 금리를 내리지 못하는 바람에 외압을 자초했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한은, 정부와 시장에 ‘등 떠밀려’ 수용


세월호 참사 여파로 소비위축에 따른 내수 및 경기부진이 심각한 수준으로 악화되자 금리 인하 요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은 여러 차례에 걸쳐 우회적으로 금리 인하 압력을 펼쳤다. 그는 “경기 부양을 위해 재정과 통화정책을 포함해 가능한 모든 방안을 동원하겠다”, “경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한은에) 충분히 전달됐다고 본다”, “한은과 경기인식을 같이 하고 있다” 등의 발언을 쏟아냈다.


최 부총리에 이어 여당 대표도 금리인하 요구에 가세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과감한 재정 정책 뿐 아니라 금리인하 등 선제적 통화정책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외부에서 금리 인하 주문이 밀려들면서 한은은 압박에 떠밀려 금리를 인하한 것 같은 모양새를 취하게 됐다.


이 총재는 이날 금통위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금통위는 스스로의 판단에 배치되는 방향으로 의사결정을 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다”면서도 “기준금리를 둘러싼 외부의 발언이 잦다 보면 금리 정책과 관련해 일반인들에게 중앙은행의 중립성을 의심하는 인식이 들도록 할 수 있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예견될 금리 인하 정책…“내수관련 지표 둔화 탓”


최경환 부총리 취임을 전후해 한은 내부에서도 금리 인하 시그널을 보내기 시작했다.


한은은 최근 올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를 4.0%에서 3.8% 하향 조정하는 한편 소비자물가상승률 전망치도 2.1%에서 1.9%로 끌어내렸다.


‘인플레이션 보고서’를 통해 향후 물가가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도 내놨다. 인플레이션에 대한 압력이 크지 않은 만큼 금리 인하 가능성도 높아졌다는 신호로 해석될 수 있다.


13개월째 유지됐던 ‘만장일치 동결’ 기조도 깨졌다. ‘2014년 제13차 금통위 의사록(7월10일)’에 따르면 정해방 금통위원은 기준금리를 현 수준에서 유지하는 것에 대해 반대의사를 표시하며 금리 인하를 주장했다.


정 위원은 “세월호 사고의 영향 등으로 내수관련 지표가 둔화되면서 경기회복세가 주춤하는 모습”이라며 “소비전망과 관련한 불확실성은 단순히 경제주체들의 심리 위축 뿐 아니라 우리 경제에 내재된 구조적 요인의 영향이 큰 것”이라고 판단했다.


정 위원을 제외한 나머지 위원들은 모두 금리 동결에 찬성했지만 “최근 국내외 경제 상황과 전망을 종합해 보면 통화정책을 좀 더 완화적으로 운용할 여지가 생겼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결국 시간이 문제일 뿐 금리인하 필요성에 공감했던 셈이다.


시장금리에 이미 기준금리 인하 기대감이 반영된 마당에 금통위가 다시 한 번 동결을 결정할 경우 시장이 충격을 받을 가능성이 큰 상황이라 운신의 폭도 좁을 수 밖에 없었다.


지난해 금리 인하 과정과 비슷한 상황


한은은 정부와 정치권, 시장의 압박에 못 이겨 금리를 조정했던 지난해 5월과 비슷한 과정을 밟았다. 한은은 금리를 인하하기 한 달 전인 지난해 4월과 올 7월 금융중개지원대출 한도를 3조원 증액한 바 있다.


지난해에는 새누리당 이한구 원내대표가 “4월에는 동결했지만 5월에는 알아서 잘 판단하리라 본다”고 발언한 데 이어 현오석 전 경제부총리도 “경제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으면 저성장이 고착화될 가능성이 있다” 며 한은을 압박했다.


김중수 전 총재는 이른바 ‘델리 발언’을 통해 금리인하 요구에 맞섰지만 결국 5월에는 기준금리를 인하하고 말았다. 그래서 “한은이 명분도 실리도 잃고 말았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김 전 총재는 지난 5월 금통위 1주일 전 인도 델리에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지난해 7월과 10월 50bp(1bp=0.01%포인트) 내린 것은 굉장히 큰 것이다. 미국과 일본도 아닌데 어디까지 가란거냐”고 말했다. 그러나 결국 인하 카드를 꺼내들면서 시장의 원성을 샀다.


최근 한국은행의 상황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주열 총재는 취임 직후 금리 인상을 시사하는 발언으로 매파 총재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시장과 정부의 공세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현 상황에서 금리를 인하해 경제 성장에 기여한다고 보기 힘들다”며 “이번 인하는 경제적 판단보다는 정치적 배경에 의한 결과라고 본다”고 말했다.


현실 외면 고정금리대출 확대…서민 이자부담 가중


금융당국이 추진한 고정금리대출 확대정책이 서민들의 이자 부담만 가중시킨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정부는 기준금리 인하(연 2.5%→2.25%)로 대출금리가 평균 0.25%포인트 하락할 경우 약 9000억원의 가계대출 이자 경감 효과가 발생할 것으로 추산했지만 25.7%에 해당하는 고정금리대출자들은 123조원의 대출에 대해 오히려 불이익을 받게 된다.


대출금리가 0.25%포인트 하락한다고 하면 이들이 받지 못하는 이자 혜택은 무려 3000억원에 달한다.


금융권에 따르면 고정금리대출은 지난 2011년 상반기까지 전체 가계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5%에 불과했으나 그해 6월 금융당국이 고정금리대출 비중을 2016년 30%까지 늘리는 내용의 ‘6.29 가계부채 종합대책’을 내놓으면서 급증했다.


2010년 말 전체 가계대출의 5.1%였던 고정금리대출의 비중은 2011년 9.3%, 2012년 19.8%, 지난해 21.3%로 오르더니 올해 6월 말에는 25.7%까지 높아졌다. 그러나 이 기간 시중금리는 급격히 떨어졌다.


2010년 연 5%였던 신규 주택담보대출 금리는 2011년 4.92%, 2012년 4.63%, 지난해 3.86%로 떨어지더니 올해 들어서는 6월 말 기준 3.58%까지 주저앉았다.


금융당국의 말을 믿고 고정금리대출을 받은 고객은 최근 3년 동안 1.34%포인트에 달하는 대출금리 하락 혜택을 놓친 셈이다.


대출금리의 하락세로 신규 가계대출 중 고정금리대출의 비중은 올해 1월 14.5%까지 떨어졌지만, 금융당국이 고정금리대출의 비중을 2017년 40%까지 늘리겠다는 가계부채 구조개선안을 2월에 내놓으면서 신규 고객 중 고정금리대출의 비중은 지난 6월 42.3%까지 다시 올라갔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지금 은행 창구에는 고정금리대출을 변동금리대출로 바꿀 수 있느냐는 고객들의 문의가 잇따르고 있는 실정”이라며 “이런 상황에서 고정금리대출 비중을 높이라는 게 말이 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문가들은 금융당국이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금융 소비자와 금융권의 현실에 맞는 유연한 정책 변화를 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금융연구원 박종규 선임연구위원은 “시중금리가 떨어지면 고정금리대출자의 상대적인 피해가 커지지만, 반대로 시중금리가 급격히 올라가면 싼 금리에 고정금리대출을 내놓은 은행들의 건전성 악화도 우려된다”며 “고정금리대출 비중이 가계대출의건전성을 나타낸다고 보기도 힘든 만큼 시장 자율에 맡기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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