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용의 세상읽기] 당신은 누구에게 산타클로스입니까

오피니언 / 정해용 / 2011-12-19 15:29:34

1971년 어느 겨울 아침 미국 휴스턴. 한 젊은 남자가 상점이 있는 거리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옷은 추하지 않게 차려입었지만 얼굴은 며칠을 굶은 듯 초췌했다. 남자는 한 식당의 쇼윈도우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유리창 안으로 보기에도 먹음직스런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남자는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한참을 서서 망설이더니 곧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종업원에게 음식을 주문하는 그의 표정은 어둡게 굳어 있었다. 식사 후 남자는 계산대 앞에 서서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겉옷 주머니를 뒤지다가 그는 안주머니와 바지주머니를 차례로 뒤지기 시작했다. “아, 이런!”하고 젊은 남자는 심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지갑을 두고 나온 것 같아요.” 뒤져본 주머니에 차례로 다시 손을 넣어보는 남자를 지켜보던 주인은 허리를 굽혀 손님의 발밑에서 무언가를 주워 올렸다. 남자 앞에 펼쳐 보인 주인의 손에는 20달러 지폐가 들려 있었다. “이건 돈이 아니고 무어요. 당신이 금방 떨어뜨린 것 같은데요.”


남자는 더욱 당황한 듯 상기된 표정으로 그 돈을 받아 밥값을 계산하고 거스름돈을 받았다. “하하하. 다음에는 떨어뜨리지 않도록 꼭 지갑에 넣어가지고 다니세요. 감사합니다.” 주인은 호방한 웃음까지 지으면서 손님을 배웅했다. 남자는 멋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식당 밖으로 나갔다.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남자는 몇 번이나 식당을 뒤돌아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주머니에서 20달러 지폐가 떨어질 리가 없었다. 남자는 직장에서 해고된 지 벌써 한 달이 넘었다. 때는 오일 쇼크로 인해 지구촌 전체가 불황에 빠진 때였다. 많은 회사들이 부도의 위험을 피해 구조정에 나섰고, 거리에는 래리처럼 대책도 없이 해고된 젊은이들이 넘쳐났다. 있는 돈이 다 떨어질 때까지 새로운 직장을 구하지 못한 그는 벌써 며칠을 굶었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던 래리는 그날 아침 빈 지갑을 침대에 던져두고 식당으로 향했다. ‘지갑에 충분한 돈이 있지만 깜박 잊고 나와 밥값을 지불할 수 없는 것처럼’ 쇼를 하려고 작정하고 나선 것이다.


“그런데 내 호주머니에서 20달러나 되는 거금이 떨어지다니.” 생각지도 못한 20달러 때문에 그는 무전취식을 하고도 당당히 식당을 나설 수 있었다. 그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래리는 집 앞에 도착할 때쯤에야 그 ‘기적’의 이유를 깨달았다. 식당 주인이 상황을 눈치 채고 쇼를 한 것이 분명했다. 주인은 돈도 없이 음식을 시켜먹은 이 뻔뻔한 젊은이에게 다른 반응을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음에 지갑을 가져와 계산해 달라’고 할 수도 있었고, 경찰을 불러 무전취식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주인은 태연스럽게 마술쇼를 부려 래리를 그 부끄럽고도 고통스런 위기로부터 구해주었다. “기적이 따로 없고, 산타클로스가 따로 없네.” 래리는 이 순간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몇 년 뒤, 다시 직장을 구해 재기한 래리 스튜어트는 식당을 다시 찾아갔다. 식당 주인, 테드 호른은 말했다. “내게도 밥값조차 없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밥 한 그릇을 그냥 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만약 그랬다면 당신은 자존심을 잃었겠죠.” 래리는 주인의 손을 덥석 잡고 눈물까지 글썽거리면서 그동안 일어난 일을 테드에게 말해주었다. “그날 당신의 선의가 내 인생을 바꾸어 주었습니다.”


래리는 얼마 뒤 취직이 되었지만 79년에 또다시 실직했다. 다시 외로운 신세가 되자 8년 전 그 일이 생각났다.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가 있었으면.” 가난한 자신에게 그런 기회가 올 것 같지는 않았다. 어느 날 작은 식당에서 초라한 옷차림의 웨이트리스를 보았다. 그녀도 직장을 잃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몇 푼 안 되는 주급으로는 생계해결도 빠듯해 허덕이고 있었다. 당장 10달러가 없어 아이들의 크리스마스 선물도 사지 못한다는 얘기를 듣고 래리가 발치에서 20달러 지폐를 주워 올렸다. “이런! 당신의 앞치마에서 떨어진 거예요.” 그녀는 생각지도 않은 돈을 보고 환호했다. “이제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 피자를 사줄 수 있겠어요.” 작은 돈일망정 아주 긴급할 때 도움을 받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를 래리는 잘 알고 있었다. 부자들에게는 몇 백만, 몇억원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많지만, 정말 곤경에 처한 사람은 단돈 몇만원 만으로도 얻을 수 있는 행복이 많은 법이다. 래리는 이후 12월마다 일정한 금액을 잔돈으로 바꾸어 많은 사람들에게 작은 기적을 선물했다. 10여년 뒤 케이블TV 사업으로 많은 돈을 벌게 된 뒤에도 그는 ‘익명의 산타클로스’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1995년 오프라 윈프리쇼에 소개되자 익명의 산타 운동은 미국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시크릿 산타’라는 홈페이지까지 개설되어 활발히 전개되던 소액 나눔 운동이 요즘은 뜸해진 것 같다. 2007년 래리가 식도암 합병증으로 사망한 뒤 시크릿 산타 홈페이지는 업데이트가 중단되었다. 전례 없는 불황이 다시 지구촌을 휩쓸고 있는 올 겨울. 하지만 어디선가는 이름 없는 산타클로스들이 이 순간에도 누군가에게 기적과 감동을 선사하고 있으리라고 믿고 싶다.



정해용 상임 논설위원(peacepres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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