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용의 고전 읽기]위태로운 나라에서 살아남는 방법

오피니언 / 정해용 / 2013-07-22 13:20:17
24. 벤처국가 정(鄭)

民之所欲 天必從之 민지소욕 천필종지
백성이 원하는 바가 있다면 하늘은 반드시 그에 따른다. (<國語> 鄭語편)
주(周) 태사 백이 정(鄭)환공에게 주나라의 앞일을 예언하며 경계한 말



경국지색 포사에게 정신을 잃었던 유왕이 융적의 공격을 받고 죽은 후 주(周)나라는 명목뿐인 천자국이 되었다. 아버지 유왕에 의해 쫓겨났던 태자가 어머니와 함께 환국하여 왕위를 이으니 곧 평왕(平王)이다. 평왕은 융적을 피하여 동쪽 낙읍(뒤에 낙양)으로 천도했으며, 이 때부터의 주나라를 동주(東周)라고 부른다. 1천명이나 되던 귀족과 제후들은 더 이상 천자에게 얽매이지 않고 각기 자기 나라를 다스리면서 서로 경쟁하거나 협력했다. 이르나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의 시작이다. 크고 작은 봉국들이 최대 200개를 넘었으며, 그 가운데 제후국 10여개 정도가 패권을 놓고 각축을 벌였다. 초기에는 제(齊)나라, 노(魯)나라, 초(楚)나라, 진(晉)나라 정도가 강했고, 위(衛) 연(燕) 송(宋) 진(陳) 채(蔡)가 주요국이었다. 한편 유왕이 피습 당했을 때 변방국 진(秦)과 신생국 정(鄭)이 가장 먼저 출동하여 왕과 운명을 같이 했으므로, 수습 직후 곧 제후국 반열로 승격됐다. 뒤에 진(晉)나라로부터 조(趙) 위(魏) 한(韓) 세 나라가 독립하여 새로운 강호로 등장하는데, 500여년이 지난 뒤 크고 작은 나라들을 모두 정복하고 통일을 이룬 나라는 진(秦)이었다.
이제 중국 역사의 중심은 춘추시대의 제후국들에게로 옮겨간다.

정(鄭) 나라는 주 유왕 시절에 새로 독립한 제후국이었다. 주 여왕(厲王)의 서자였던 희우(姬友)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여왕이 실정(失政) 끝에 쫓겨난 뒤 공화시기에 왕실을 지켰고, 서형(庶兄)인 선왕(宣王)이 즉위하자 물러나 낙하와 황하 일대를 다스렸다. 그러나 왕실의 기강이 점차 흐트러지는 데다 마침내 유왕의 폭정으로 정세가 심상치 않게 되어가자 우는 무사히 목숨을 지키는 일조차 어려움을 예감했다. 앉아서 죽을 것인가, 반발하여 맞설 것인가, 어딘가로 달아날 것인가. 선택의 여지는 좁았다.

우는 스승 백(伯)과 상의했다. “조정에 재난이 많으니 내가 죽음을 면하려면 장차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러자 태사 백이 대답했다. “낙하(雒河) 동쪽, 황하(黃河) 이남으로 가시면 편안히 지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해법이었다.

“왜 그렇습니까?” 왕자가 묻자 백이 대답했다. “그곳은 괵과 회나라가 가까운 곳입니다. 괵왕과 회왕은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한 사람들이라 백성들이 싫어합니다. 왕자께서 그곳으로 가신다면 백성들이 반가워할 것이고, 그곳에 머물려 하신다면 괵과 회가 왕자님의 권세를 보고 기꺼이 토지를 떼어드릴 것입니다. 진실로 그곳에 사신다면 괵, 회의 백성은 바로 당신의 백성이 될 겁니다.” 그러면서 백은 장차 제, 진(秦), 진(晉), 초나라가 강성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우는 곧 조카인 유왕에게 허락을 청하여 낙하 동쪽으로 옮겨갔다. 과연 백성들이 그의 영지로 몰려오고 괵, 회의 군주들은 10개의 마을(邑)을 떼 주었다. 우는 이것으로 정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군주가 되었다. 그가 곧 정나라 시조(始祖) 환공이다.

침몰해가는 배에는 반드시 조짐이 있게 마련이다. 희우는 흔들리는 나라를 구하려고 최선을 다했으나 마침내 대들보가 기울자 이를 붙잡고 무모한 씨름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 집을 빠져나와 자신만의 새로운 터전을 일굼으로써 자기 목숨도 보전하고 후손을 위한 반듯한 가업을 일으켰다. 한때 쟁쟁했던 기업들도 시간이 지나고 대물림이 이어지면 크게 기우는 때가 온다. 그러면 사세의 전통에 매달려 끝까지 남아있다 함께 침몰하는 사람도 있고, 일찌감치 빠져나와 자기 힘으로 새 기업을 일궈 모(母)회사를 능가하는 사람도 있다. 희우가 세운 정나라는 일종의 고대 ‘벤처국가’였던 셈이다.


- 이야기 Plus
공교롭게도 중국에 춘추전국시대가 펼쳐지던 시기는 유럽에서 그리스 도시국가(Polis)가 형성된 시기와 겹쳐진다. 중국의 춘추시대(BC770-403년)와 전국시대(BC403-221년)는 그리스의 상고기(BC750-500년경), 고전기(BC500-323) 및 헬레니즘시대(BC323-146년)와 대체로 비슷하다. 이후 중국과 유럽에는 한(漢)나라와 로마라는 강대한 통일군주국이 들어서게 되는 것까지 우연스럽지 않게 유사하다.

사람들은 흔히 ‘분열’보다는 일사불란한 통일성을 미덕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역사의 다양성면에서 보자면 세계는 강대한 하나의 힘으로 통제되는 시기보다는 힘의 구심이 다양하게 분열되어 있는 시대에 더욱 활발하게 문명의 발전을 이루었다. 그리스의 도시국가들 속에서 수많은 이론가(Sophist)들이 등장하여 유럽 철학의 기원을 이룬 것처럼,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도 수많은 사상가들이 탄생했다. 제자백가(諸子百家) 백가쟁명(百家爭鳴) 백화제방(百花齊放) 같은 말들이 여기에 견주어 생겨났다. 물론 말만 그럴싸한 ‘사이비’도 많다. 유럽의 소피스트라는 말이 ‘궤변가’와 동일시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속에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대표되는 혁혁한 서양철학의 비조(鼻祖)들이 등장했다. 춘추전국시대에도 혹세무민하는 사이비들이 적지 않았으나, 그 가운데서 노자 장자 공자 맹자 묵자 순자 한비자 등 이른바 구류십가(九流十家)의 걸출한 원조들이 등장했다. 이 시기에 천문학 수학 물리학 생물학 의학 건축 병법들이 정치와 사회윤리 이론과 함께 발전했다. 서로 경쟁하는 다양한 세력들 사이의 활발한 경쟁과 이합집산이 다이내믹한 동력이 된 까닭이었을 것이다 .



마침내 유왕의 폭정으로 정세가 심상치 않게 되어가자 왕자 우(友)는 목숨을 지키는 일조차 어려움을 예감했다.

앉아 죽을 것인가, 혁명을 일으킬 것인가, 멀리 달아날 것인가. 선택의 여지는 좁았다. 태사 백이 새로운 해법을 제시했다.


[ⓒ 토요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뉴스댓글 >

    많이 본 기사

    S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