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연극계의 거목 사라지다.

문화·라이프 / 토요경제 / 2006-05-15 00:00:00

한국의 연극계 1세대인 배우 김동원 선생이 13일 서울 이촌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0세. 고인은 2004년 6월 뇌질환으로 쓰러진 뒤 투병생활을 해 왔다.
1932년 배재고보 재학 중에 연극 ‘고러(연출 유치진)로 데뷔한 고인은 94년 ‘이성계의 부동산’(연출 김도훈)을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 62년 동안 300여 편의 연극에 출연한 한국 현대극의 산 역사였다.
1916년 개성에서 태어난 고인은 배재고보 재학 시절부터 연극의 매력에 빠졌다. 이때 한국 현대극의 거목 유치진을 만났으며 이후 유치진 작품의 단골 배우가 됐다. 일본 니혼대학 예술과 유학 시절인 34년 동경학생예술좌 창립동인으로 본격적인 연극 활동을 시작한 그는 수려한 용모와 미성을 토대로 극단 극예술협회, 국립극단 전신인 극단 신협 등의 주역 전문배우로 자리 잡았다.
일제시대 ‘춘향전’에 출연하던 중 좌익으로 몰려 구속되기도 했던 그는 한국전쟁 와중에 북한으로 끌려가다 탈출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51년 피란지이던 대구 키네마 극장에서 국내 초연한 ‘햄릿’(연출 이해랑)에서 겨우 7일 동안 연습하고 무대에 선 것은 연극계에서 가장 유명한 일화 가운데 하나다. 이후 ‘오델로’의 오델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스탠리, ‘세일즈맨의 죽음’의 윌리 로먼,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텔레스, ‘남한산성’의 인조 등 주역을 맡아 명연기를 펼쳤다. 특히 ‘햄릿’ 역은 일생 동안 네 번이나 맡아 ‘영원한 햄릿’이란 별명을 얻었다.
연극이 침체에 빠지고 영화가 흥성하던 1950∼60년대엔 ‘자유부인’ ‘춘향전’ 등 4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여 은막의 스타로 불리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고인은 수많은 영화에 출연했지만 “성취감을 느낀 작품이 없었다”고 고백할 만큼 연극 무대를 사랑한 배우였다.

평소 “다시 태어나도 배우가 되고 싶다”고 할 만큼 그의 삶은 연기를 향한 외길이었다.
70년대 이후 영화나 TV에서 거금을 제의하며 출연해 달라는 유혹도 많았지만 모두 거절했을 만큼 한번도 굽힘이 없었던 고인에게는 ‘수도자’라는 말까지 따랐다. 광고 한번 안 나갔던 일도 요즘 세태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대목이다.
또한 김씨는 무대에서나 가정에서나 ‘영원한 햄릿’이라는 별명에 걸 맞는 ‘영국 신사’였다. 지인들은 “연극과 인생 모두에서 모범생인데다 미남이라, 여배우들이 접근했지만 놀랍게도 스캔들은 전무했다”고 전했다. 또한 “예술과 인생 모두에서 정성을 다한, 철저한 삶을 살았다”며 ‘뇌우’ ‘햄릿’ ‘메피스토펠레스’ 등 세 작품을 최대의 명연작으로 꼽는다고 지인들은 회고했다.
김 선생은 술을 입에 대지 않던 “하하” 잘 웃는 사람이였다고 기억하는 이들도 있었다. 다른 사람을 입에 잘 올리지 않던 그는 고향인 개성 사람의 깔끔한 기질이 강했다고 한다.
극단 산울림의 임영웅 대표는 “술 담배도 안 하는 단정하고 완벽한 영국 신사”로 고인의 단아한 생을 압축했다. 임 씨는 “고인은 옷도 잘 차려입은 멋쟁이 베스트 드레서였고, 후배들에게도 자상하게 잘 대해준 신사였다”고 회고했다. 숨진 직후 유족 측으로 부터 연락을 받은 임씨는 고인과 동갑내기인 원로 연출가 이원경, 영화감독 김수용 씨 등과 첫 날 빈소를 지킨 데 이어 이튿날인 14일에도 자리를 지키며 고인의 삶과 예술을 떠올렸다.
극단 신협에서 함께 활동한 장민호씨는 “같이 무대에 섰던 연극인 가운데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딱 1명 남았었는데 모두 떠나버리니 눈물이 난다”며 슬픔에 젖었다. 연극인 박정자씨는 “배우로서도 훌륭했지만 화목한 가정을 이끌어 가장으로서도 훌륭했다”며 “무대 위에선 절대군주여서 어떤 배우라도 옆에 서면 빛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선생님 독무대였다”고 기억했다.
장례는 17일 오전 10시30분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대한민국 예술인장(장례위원장 차범석)으로 치러진다. 장지는 경기도 용인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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