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원 칼럼] 추석 앞당긴 9.6조…상생에는 빠른 입금이 더 힘이 세다

오피니언 / 김승원 / 2026-09-18 23:06:22
▲ 김승원 토요경제신문 상무
명절을 앞둔 중소기업에는 하루가 길다. 직원 급여와 상여금, 원재료 대금과 결제일이 한꺼번에 몰린다. 장부에 매출이 있어도 통장에 현금이 없으면 대표는 은행부터 찾는다. 그런 협력사를 위해 국내 주요 대기업들이 추석 전 지급일을 앞당기고 있다. 거창한 상생 구호보다 반가운 것은 빠른 입금이다.

한국경제인협회 조사에 응한 삼성·SK·현대자동차·LG·한화·롯데·포스코·HD현대·GS·신세계·한진·KT·LS·CJ·카카오·두산·네이버·현대백화점·효성·하림 등 20개 그룹이 앞당겨 지급하는 납품대금만 9조6000억원이다.

이름을 모두 적는 이유가 있다. 잘한 기업은 함께 불러줘야 좋은 관행이 더 넓어진다.

현대차그룹은 6000여개 협력사에 2조2562억원을 최대 23일 앞당긴다. 현대차·기아뿐 아니라 현대모비스·현대건설·현대제철·현대글로비스·현대트랜시스·현대위아 등이 동참한다. 1차 협력사에는 2·3차 협력사의 대금도 앞당겨 달라고 권고했다.

삼성은 삼성전자·삼성물산·삼성바이오로직스·삼성SDI·삼성중공업 등 13개 관계사가 1조3000억원을 약 7일 먼저 지급한다. LG는 LG전자·LG이노텍·LG화학·LG에너지솔루션·LG유플러스 등 8개 계열사가 6000억원을 최대 13일 앞당긴다.

롯데는 27개 계열사가 1만2000여개 파트너사에 9495억원, CJ는 CJ제일제당·CJ올리브영·CJ대한통운 등 6개 계열사가 7400여개 중소 납품업체에 6600억원을 조기 지급한다. 현대백화점그룹도 15개 계열사와 거래하는 1만여 협력사에 2738억원을 최대 9일 먼저 지급한다.

신세계그룹은 이마트·신세계백화점·SSG닷컴이 조기 지급분과 정기 지급분을 합쳐 1조9500억원을 집행한다. 평소에도 매월 여러 차례 대금을 지급하지만 명절을 앞두고 일부 지급일을 최대 12일 당겼다.

한경협 집계 밖에서도 동참은 이어진다. 중흥그룹은 중흥건설·중흥토건 협력사에 공사대금 700억원을 전액 현금으로 조기 지급한다. 아모레퍼시픽그룹은 9개 계열사의 600여개 협력사에 649억원을 최대 10일 앞당긴다. 대상은 243개 협력사에 400억원을 무려 30일 먼저 지급했다. 오뚜기도 22개 협력사에 129억원을 전액 현금으로 앞당겨 지급한다.

누군가는 말할 수 있다. 어차피 줘야 할 돈을 며칠 먼저 주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일이냐고.

맞는 말이다. 납품대금은 기부가 아니다. 협력사가 일하고 물건을 납품해 받을 정당한 돈이다. 그러나 중소기업에는 그 며칠이 중요하다. 받을 돈 10억원이 열흘 늦게 들어오는 동안 월급날과 원재료 결제일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결국 단기대출을 받고 이자를 낸다. 대기업이 지급일을 앞당기면 그만큼 협력사의 금융비용과 자금 압박이 줄어든다.

더 반가운 것은 상생의 물길이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현대차·SK·LG·HD현대·효성 등은 2·3차 협력사까지 자금이 원활하게 흐르도록 제도를 넓히고 있다. 1차 협력사 통장에서 돈이 멈춘다면 상생은 절반이다. 마지막 부품업체까지 현금이 내려가야 공급망 전체가 튼튼해진다.

기업 생태계에서 현금은 혈액과 같다. 대기업이 아무리 잘 벌어도 협력사의 자금줄이 막히면 품질과 납기, 결국 완제품 경쟁력까지 흔들린다. 납품대금을 빨리 지급하는 일은 선행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공급망을 지키는 투자다.

삼성에서 현대차, SK, LG, 한화, 롯데, 포스코, HD현대, GS, 신세계, CJ, 현대백화점, 그리고 중흥·아모레퍼시픽·대상·오뚜기까지 이번에 이름을 올린 기업들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다만 명절 때만 나오는 미담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조기 지급과 현금성 결제가 평상시 거래 관행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그래서 언젠가는 '추석이라 일찍 준다'는 뉴스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 더 좋은 상생일 것이다.

올 추석 기업들이 보여준 것은 단순하다. 상생에는 말보다 입금이 빠를수록 좋다.

 

토요경제 / 김승원 ksw903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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