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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승원 토요경제신문 상무 |
상상해보자. 새벽 장터에 말발굽 소리가 나고, 향신료 상인과 비단 장수가 몰려온다. 누군가는 베네치아 은화를 내밀고, 누군가는 낡은 금화를 꺼낸다. 동전의 얼굴도, 무게도, 믿음도 제각각이다. 그때 장터 한가운데 앉은 환전상이 동전을 두드려보고, 무게를 재고, 값을 매긴다. 사람들은 그 나무 탁자 앞에서 물건만 바꾼 것이 아니다. 서로의 신용을 바꿨다.
흥미로운 이야기도 전해진다. 환전상이 돈을 제대로 갚지 못하거나 신용을 잃으면 그가 쓰던 탁자를 부숴버렸다고 한다. 깨진 탁자, 곧 ‘방카 로타(banca rotta)’가 오늘날 파산을 뜻하는 ‘뱅크럽트(bankrupt)’의 어원이 됐다는 말이다. 금융의 출발점에는 처음부터 돈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바로 믿음이다. 탁자가 무너지면 장사도 끝났다. 신용이 깨지면 금융도 끝났다.
그래서 금융권의 사회공헌은 선택이 아니라 원점 회복에 가깝다. 금융은 돈을 다루지만, 결국 사람을 다루는 산업이다. 은행은 예금자의 돈으로 대출을 하고, 증권사는 투자자의 돈을 시장으로 보내며, 캐피탈사는 필요한 곳에 신용을 공급한다. 돈이 모이는 곳일수록 책임도 모여야 한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하지만, 금융회사의 곳간은 혼자 채운 곳간이 아니다. 고객과 시장, 지역사회가 함께 채운 곳간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금융권의 몇몇 움직임은 칭찬할 만하다. 신한금융지주(회장 진옥동)는 최근 취약계층 먹거리 지원 사업인 ‘그냥드림’ 지원을 늘리고 임직원 봉사로 나눔키트를 만들었다. 빈 식탁 위에 올리는 한 끼는 숫자보다 따뜻하다. 하나금융지주(회장 함영주)는 발달장애인 예술가와 함께 청소년 공간에 벽화를 그렸다. 회색 벽에 색을 입히는 일은 작은 일이지만, 그 공간을 오가는 아이들에게는 하루의 표정이 달라지는 일이다. KB국민은행(은행장 이환주)은 전통시장에서 식료품을 사 이웃에게 나누는 ‘전통시장 사랑나눔’을 이어가고 있다. 장터에서 태어난 금융이 다시 장터로 들어간 셈이다. NH투자증권(대표 윤병운)은 농번기 포도농가를 찾았다. 책상 위 숫자만 보던 금융이 포도송이에 봉지를 씌운 일이다. KB캐피탈(대표 빈중일)은 취약계층 아동·청소년에게 경제금융 교육을 지원했다. 돈을 빌리는 법보다 먼저 돈을 이해하는 법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다만 칭찬은 홍보용 박수가 아니다. 금융권은 여전히 높은 이자 부담, 불완전판매, 내부통제 부실, 금융소외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봉사조끼 한 번 입었다고 모든 책임이 사라지지 않는다. 사진 속 미소보다 중요한 것은 제도 속 배려다. 서민금융, 채무조정, 고령층 보호, 청소년 금융교육, 소상공인 지원이 함께 가야 한다. 금융의 진짜 봉사는 행사장에서가 아니라 약관과 심사표, 상담 창구와 대출 문턱에서 드러난다.
그래도 잘한 일은 잘했다고 해야 한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다. 고래가 춤춘다면 금융회사도 춤추지 말란 법은 없다. 다만 그 춤은 회장실과 행장실 안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장터로 가야 한다. 골목으로 가야 한다. 농가로 가야 한다. 아이들이 있는 공부방으로, 어르신들이 서 있는 창구로, 빚 때문에 밤잠을 설치는 소상공인 곁으로 가야 한다.
이번 칭찬은 “이만하면 됐다”는 면죄부가 아니다. “잘했으니 더 크게 하라”는 주문이다. 금융회사가 사회공헌을 많이 한다고 해서 비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좋은 일을 더 많이 하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잘한 일을 제대로 보아주는 것이다. 손가락질만으로는 세상이 고쳐지지 않는다. 때로는 박수도 방향을 만든다.
금융회사의 품격은 순이익 숫자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어려운 사람이 금융에서 밀려나지 않게 할 때, 지역사회가 힘들 때 먼저 손을 내밀 때, 돈의 길목에 온기를 놓을 때 드러난다. 은행의 뿌리가 장터의 작은 벤치였다면, 오늘의 금융도 다시 사람 곁으로 가야 한다.
칭찬은 오늘 한다. 내일을 위한 기대다. 돈이 춤추는 금융보다, 사람을 웃게 하는 금융이 더 오래 간다. 깨지지 않는 탁자 위에 신뢰가 놓일 때, 금융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토요경제 / 김승원 ksw903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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