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미국서 만들라” 압박…美기업 4곳은 한국 반도체 생태계로

국제 / 최은별 기자 / 2026-09-04 21:42:33
에어프로덕츠·엑셀리스·코닝·퍼시피코 20억달러 투자
관세 압박 속 한미 공급망은 ‘일방 이전’보다 ‘상호 의존’ 부각
▲ 트럼프 대통령 [연합뉴스]

 

미국이 반도체 관세를 앞세워 “미국 생산”을 압박하는 사이, 미국 첨단기업 4곳은 한국 반도체·첨단소재·청정에너지 생태계에 20억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다. 4일 오후 외신과 정부 발표를 종합하면 이번 투자는 한국이 단순한 수출기지가 아니라 미국 기업도 들어와야 하는 첨단 제조 거점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전날 오후 미국 워싱턴D.C.(현지시간·한국시간 4일 오전)에서 코트라와 함께 투자신고식 및 라운드테이블을 열고 미국 기업 4곳으로부터 총 20억달러 규모 외국인직접투자 신고를 받았다고 밝혔다. 투자 분야는 반도체 소재·장비, 디스플레이용 첨단소재, 해상풍력이다. 산업부는 이번 투자신고식을 “공급망 재편 등 불확실한 경제·통상 환경에서도 견고하게 이어지고 있는 한국과 미국 간 투자 협력 관계”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설명했다.

로이터도 전날 (한국시간 4일 오전) “미국 기업 4곳이 반도체, 첨단소재, 에너지 분야에서 한국에 총 20억달러 투자를 약속했다(Four U.S. companies have committed a combined $2 billion of investment in South Korea across semiconductors, advanced materials and energy)”고 보도했다. 로이터는 투자가 전날 워싱턴에서 김정관 산업부 장관이 참석한 행사에서 발표됐다고 전했다.

내용을 보면 투자 방향은 한국의 반도체 생태계 핵심 부위와 맞닿아 있다. 에어프로덕츠는 경기 평택에서 반도체용 가스 공급시설을 증설한다. 산업부는 이 사업이 에어프로덕츠의 한국 진출 이후 최대 프로젝트이며, 반도체 미세공정에 활용되는 희귀가스 설비도 포함된다고 밝혔다. 엑셀리스는 이온주입 공정 장비 생산을 확대한다. 산업부는 한국이 엑셀리스의 미국 외 유일한 이온주입기 제조 거점이라고 설명했다. 코닝은 차세대 모바일 기기와 반도체 분야 첨단소재 설비 투자를 늘리고, 퍼시피코 에너지는 전남·광주 지역 3.2GW 해상풍력 사업을 본격화한다.

이 대목이 중요하다. 미국은 한국 반도체 기업에 미국 투자를 요구하고 있지만, 미국 기업들은 오히려 한국의 기존 제조 클러스터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반도체용 가스, 희귀가스, 이온주입 장비, 특수유리, 재생에너지는 완제품 반도체의 주변 산업이 아니다. 공정 안정성, 생산 수율, 전력 조달, 차세대 패키징까지 연결되는 기반이다. 미국 기업의 한국 투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생산능력만 보고 들어온 것이 아니라, 그 주변에 형성된 소재·장비·인프라 수요를 보고 움직인 결과다.

반대로 미국의 압박도 분명하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 2일(한국시간 3일 오전) 하워드 루트닉 미 상무장관이 반도체 관세 방안을 준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루트닉 장관은 “표적화되고 신중한 관세 정책(targeted, thoughtful tariff policy)”을 예고하며 “여기서 만들면 관세를 내지 않는다(if you build here, you don’t pay)”, “여기서 만들지 않으면 세계 최대 시장에 들어올 때 비용을 낼 각오를 해야 한다(if you don’t build here, expect to pay to enter the greatest market in the world)”고 말했다.

로이터는 4일(한국시간 오후) 한국과 미국이 광범위한 양자 협상 일부로 미국 내 반도체 투자를 논의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미국 반도체 관세가 투자 협상에 영향을 주느냐는 질문에 “한미 사이에는 여러 이슈가 있고 때로 서로 영향을 미친다(There are various issues between South Korea and the United States, and they are sometimes affecting each other)”고 답했다. 로이터는 지난해 양국 정상 간 합의에 한국의 미국 제조업 3500억달러 투자 약속이 포함됐고, 한국 반도체 기업은 경쟁국보다 “불리하지 않은(no less favourable)” 관세 대우를 받기로 했다고 전했다.

따라서 이번 사안을 단순히 “미국이 한국을 압박한다”로만 보면 절반만 본 것이다. 미국은 관세를 통해 한국 기업의 미국 생산을 끌어내려 한다. 그러나 같은 시점에 미국 기업은 한국의 평택 반도체 가스망, 한국 내 이온주입 장비 생산, 한국의 첨단소재 제조기반, 한국의 해상풍력 전력 인프라에 투자한다. 공급망은 한 방향으로만 이동하지 않는다. 미국은 최종 시장과 관세 권한을 갖고 있지만,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와 제조 클러스터, 아시아 생산거점이라는 실물 기반을 갖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도 4일 공개한 반도체 팟캐스트 전사에서 메모리 산업의 전략성을 짚었다. 댄 김 맥쿼리 애널리스트는 “미국이나 미국 파트너국 가운데 한국을 제외하면 의도적인 메모리 전략을 거의 보지 못했다(I haven’t really seen a memory strategy from either the US or any of the partner countries of the United States that is very deliberate, except for South Korea)”고 말했다. 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한국 내 부지에서 빠르게 증설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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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수출 구조도 이 논리를 뒷받침한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 1일 “한국의 반도체 주도 수출 증가가 8월에도 이어졌다(South Korea’s semiconductor-led export surge extended into August)”며 AI 수요가 식고 있다는 신호가 거의 없다고 보도했다. 이 매체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세계 최대 메모리 반도체 기업이며, AI 인프라 수요가 강한 가운데 공급이 타이트하게 유지될 것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한국경제에는 두 가지 과제가 동시에 생겼다. 하나는 미국 관세 압박에 맞춰 대미 투자와 관세 예외를 관리하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미국 기업이 찾아오는 국내 반도체 생태계의 밀도를 유지하는 일이다. 미국에 공장을 짓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국내에 남는 소재·장비·가스·전력·인력 기반이 약해지면 한국은 수출국 지위는 지켜도 공급망 주도권은 잃을 수 있다.

이번 미국 기업 4곳의 투자는 그래서 방어적 뉴스가 아니라 협상 카드다. 한국은 미국 시장에 접근해야 하지만, 미국 기업도 한국 생산망에 접근해야 한다. 관세의 시대에 중요한 질문은 어디에 공장을 짓느냐만이 아니다. 누가 공급망의 병목을 쥐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한국 반도체 전략의 다음 화두는 미국에 얼마나 투자하느냐가 아니라, 미국의 압박 속에서도 한국 안에 어떤 핵심 생태계를 남길 것이냐에 있다.

 

토요경제 / 최은별 기자 ceb@sateconom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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