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분기 주문 예약만 12조원...美나스닥서 사상 최고가 경신
반도체업계 주문 경쟁에 '골라 파는' 기현상...귀한몸 대접
| ▲방진복을 입은 윤석열 대통령(왼쪽 부터)이 지난달 12일(현지시간) 벨트호벤 소재 ASML 본사에서 빌럼-알렉산더르 네덜란드 국왕과 함께 클린룸을 방문, 크리스토프 푸케 ASML 최고사업책임자의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제조업종에서 통상 장비 납품업체는 대표적인 '을(乙)'로 통한다. 제조업체가 장비를 발주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기업의 존망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배터리(2차전지) 등 대형 첨단 장치산업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메이저기업에 장비를 공급하는 것만으로도 고성장을 담보할 수 있기에 철저히(?) 을의 입장일 수 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다만, 특정 기업이 특정 장비를 독점 공급한다면 상황이 좀 다르다. 특히 특정 장비가 고난이도의 기술력을 요하고 대안을 마련하는 데 장시간이 소요되는 핵심 장비라면 얘기는 많이 달라진다.
극자외선(EUV) 노광기 전문업체인 네덜란드의 ASML은 반도체 시장에선 '슈퍼을'로 통한다. ASML은 제조업체에 장비를 납품하는 사업구조만 놓고 보면 분명 을인데, 을답지 않은 강한 지위에 있다는 의미다.
◇ 반도체 빅3간 나노전쟁으로 몸값 갈수록 치솟아
ASML이 반도체 시장에선 '슈퍼을'로 불리는 이유는 단 한가지다. 이 회사가 개발, 판매하는 EUV노광기를 대체할만한 기술이나, 경쟁기업이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ASML의 EUV노광기는 반도체업계에선 7나노(nm) 이하의 초미세 회로를 구현하는 선단 공정에선 절대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 장비로 인식되고 있다.
ASML의 몸값을 급증하고 있는 이유는 EUV노광기 수요에 맞춰 캐파(생산능력)를 늘리지 않고 있는 점이다. 수요초과 상태가 심화되다 보니, ASML의 몸값은 날이 갈수록 치솟고 있다. 이제 내로라하는 글로벌 빅테크기업 못지않게 '귀하신몸'이 됐다.
특히 삼성전자, TSMC, 인텔 등 글로벌 반도체 빅3간에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나노 전쟁'으로 ASML의 존재 가치는 더욱 높아지는 추세다.
삼성이 세계 첫 3나노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정 양산에 돌입하면서 시작된 이른바 '나노 전쟁'에서 EUV노광기는 필수불가결한 장비로 평가받는다.
| ▲ASML의 최대 고객사중 하나인 삼성전자의 첨단 반도체공장 내부. <사진=삼성전자> |
반도체는 회로 선폭이 좁을수록 저전력·고효율 칩을 만들 수 있으며 회로를 좁히면 반도체기업의 생산성이 획기적으로 높아진다.
노광기는 웨이퍼 위에 미세회로를 새기는 카메라와 같은 장비인데, 3나노 이하의 초미세 공정에선 초정밀 EUV노광기를 대체할 기술이 아직 상용화되지 않았다.
ASML의 EUV노광기를 확보하지 않고선 나노 전쟁에서 결국 낙오자가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상황이 이렇게되자, 글로벌 반도체기업들은 EUV노광기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자연히 EUV노광기는 공급가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ASML의 차세대 노광기의 경우 시스템당 무려 6천억원대를 오르내릴 정도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워낙 공급이 달리다보니, 물량 확보가 우선이며 가격은 별 문제가 아니다. '슈퍼을'이던 ASML이 이제 '슈퍼갑'으로 위상이 달라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지난해 윤석열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으론 처음으로 네덜란드를 국빈방문하면서 이재용 삼성회장과 최태원 SK회장을 대동, 첫 방문일정으로 ASML 본사 방문을 택한 것이 현 분위기를 함축적으로 설명한다.
◇ ASML 주문 폭주에 실적 대폭 개선...주가 급등세
천문학적 데이터와 빠른 연산 및 추론을 요구하는 거대 생성형 인공지능(AI)의 전세계적인 열풍은 EUV장비의 수급 불균형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거대 AI를 구현하기 위해선 고효율, 고집적 AI반도체가 필수적이며 이러한 반도체를 제조하기 위해선 결국 ASML의 EUV노광기가 없이는 불가능에 가깝다.
피터 베닝크 ASML 최고경영자(CEO)는 블룸버그TV와의 인터뷰에서 "AI는 대규모 컴퓨팅 능력과 데이터 스토리지가 필요하다"면서 "ASML이 없이는, 즉 우리의 기술이 없으면 AI붐이 일어날 수 없을 것"이라며 밝혔다.
|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회장, 최태원 SK회장 등이 펠트호번 ASML 본사에서 한·네덜란드 첨단 반도체 협약식을 마친 뒤 박수를 치고 있다. <사진=대통령실> |
ASML이 의도했던 안했든 현 상황에서 ASML의 EUV노광기는 첨단 반도체 시장경쟁의 판도를 바꿀만한 위력을 지닌 일종의 '비대칭 무기'가 된 형국이다.
이에 따라 전세계 내로라하는 반도체업체들의 ASML에 대한 러브콜을 보내고 있고, 예약 주문이 몰리고 있다. 공급여력이 부족해 수요자를 골라서 파는 기현상에 ASML은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ASML이 24일(현지시간) 공식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EUV노광기 주문 예약은 91억9천만유로에 달한다. 한화로 약 12조3천억원이다.
이는 전 분기(26억유로) 대비 353%나 급증한 것이다. 또 애널리스트들의 평균 예상치(36억달러)에 3배 가까이에 달하는 규모다.
더욱 주목을 끌고 있는 것은 예약 주문 중 최첨단 EUV노광장비가 60%(56억유로)정도 차지한다는 사실이다. '하이NA'란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한층 업그레이된 이 장비는 2나노 이하 초미세 공정에 적합한 것으로 시스템당 공급가가 5천억원을 크게 웃도는 것으로 전해진다.
덕분에 ASML의 실적도 날개를 달았다. 지난해 ASML의 순매출은 276억유로(약 40조1193억원)이며 순이익은 78억유로(약 11조 3380억원)이다. 각각 전년 대비 30%, 39.4% 증가했다. 매출 총이익률이 무려 51.3%에 달한다.
실적 개선과 고부가 하이NA EUV노광기 주문이 쇄도하면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거래소 증권거래소에서 ASML 주가는 전날보다 9.7% 상승한 775.80유로로 마감했다. 사상 최고치를 또다시 경신했다.
기술주 위주인 미국 나스닥시장에서도 24일(현지시간) 전일 대비 8.85% 급등한 847.31달러로 마감됐다. 역대 최고가이며 52주 최저가 대비 50% 상승했다. 이날 장마감 후 거래에선 849.50달러까지 치솟았다.
회사가치의 한 지표인 시가총액도 이날 종가기준 3313억달러까지 불어났다. 한화로 442조6천여억원에 달한다. 최근 가파른 주가 상승으로 메모리 세계 최강 삼성전자(442조3천억)의 시총을 넘어섰다.
씨티그룹은 이날 고객들에게 보낸 메모에서 "시장에서 올 상반기 수주 증가를 예상했으나 그 시기가 앞당겨졌다"면서 "ASML의 지난 4분기 수주 증가는 향후 강력한 성장 기대감을 높여줘 주가도 상승세를 보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토요경제 / 이중배 기자 dialee0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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