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의 문화산책] 전시장에 닭을 들여놓은 작가 이강소

마리아의문화산책 / 마리아김 칼럼니스트 / 2026-07-29 15:43:37
오리는 물결이 되고 바람이 된다

전시장 한가운데 살아 있는 닭 한 마리가 있다. 닭은 미술을 모른다. 작품을 만들겠다는 의도도 없다. 다만 걷고, 멈추고, 고개를 돌리고, 다시 발을 뗀다. 바닥에는 흰 가루가 깔려 있다. 시간이 지나자 그 위로 닭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남는다. 작가는 그 흔적을 작품으로 내놓았다. 1975년 제9회 파리비엔날레에서 이강소가 선보인 '무제 75031'이다.

그 장면은 지금 떠올려도 낯설다. 화가가 붓을 들지 않았는데 그림이 생겼다. 작가가 통제한 선보다 닭의 움직임이, 계획보다 우연이, 완성된 결과보다 지나간 시간이 작품이 됐다. 이 파격적인 장면은 한국 실험미술의 한 순간을 세계 미술계 앞에 드러냈고, 이강소라는 이름을 강렬하게 각인시켰다.
 

▲ 이강소,  [롯데뮤지엄]

 

이강소 개인전 '이강소: 일어나고 사라지는(Emergence and Dissolution)'이 다음달 21일 롯데뮤지엄에서 개막한다. 제목부터 이강소답다. 그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고정된 결과물이 아니다. 무엇인가가 일어나고, 지나가고, 사라진 뒤 남는 흔적이다. 전시장에 가기 전 이 작가의 세계를 조금 알고 들어가면, 우리는 같은 작품 앞에서도 전혀 다른 장면을 보게 된다.

많은 사람은 이강소를 ‘오리 그림’으로 기억한다. 빠른 붓질로 나타난 오리,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형상, 넓은 여백과 거침없는 선. 그러나 이강소의 회화는 오리의 외형을 설명하는 그림이 아니다. 시작은 어느 겨울, 얼음이 언 연못가였다. 햇빛을 받으며 차가운 물가에서 살아 움직이는 오리들을 본 작가는 그 생동감을 회화로 옮길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눈앞의 오리를 그대로 묘사하는 일은 이미 지나온 회화의 방식이었다.

그가 붙잡고 싶었던 것은 살아 있는 것이 눈앞에 나타나는 순간의 기운이었다. 붓이 지나간 찰나, 공기의 흐름, 보는 사람의 기억 속에서 다시 떠오르는 어떤 형상. 그래서 그의 그림은 어떤 사람에게는 오리로 보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구름이나 물결, 바람처럼 보인다. 정답을 맞히는 그림이 아니라 각자의 경험을 불러내는 그림이다.

오리인 줄 알고 다가가면 어느 순간 물결이 보이고, 물결인 줄 알았던 자리에서 바람이 인다. 이것이 이강소 회화의 묘미다.


▲ 이강소, 〈The Wind Blows-250713〉, 2025, 캔버스에 아크릴, 112 x 145.5 cm.[롯데뮤지엄]

 

1943년생인 이강소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일찍부터 회화라는 한 형식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에게 예술은 세계가 어떻게 나타나고 사라지는지를 묻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회화와 조각, 설치와 퍼포먼스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1970년대 한국미술을 떠올리면 흔히 단색화의 조용한 화면을 먼저 생각한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또 다른 움직임도 있었다. 작품이 완성된 물건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 될 수 있다고 믿은 작가들이 있었다. 이강소는 그 한가운데 있었다. 그는 무엇을 그릴 것인가보다, 무엇이 작품이 될 수 있는가를 물었다.

그 질문은 이후 회화로 돌아온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붓질은 무언가를 또렷하게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한 번 스치고 지나가듯 남았다가, 보는 이의 눈앞에서 다시 흩어진다. 오리의 형상은 분명히 떠오르는 듯하지만 다음 순간에는 물결이 되고, 바람이 되고, 말 없는 움직임이 된다. 그래서 이강소의 회화는 추상과 구상 사이에 있다기보다, 나타남과 사라짐 사이에 있다.

그가 말한 생동감은 햇빛을 받은 오리의 몸이 물 위에서 움직이는 기척이었다. 붓이 한 번 지나가고, 먹과 색이 번지고, 여백이 남았을 뿐인데 관객은 화면에서 마음을 움직이는 일렁임을 느낀다. 아무것도 정확히 말하지 않는데 무엇인가 살아 있는 듯하다.

이강소의 작업에서 동양적인 정서와 서양적인 실험성을 함께 말하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여백과 기운, 자연의 흐름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동양의 사유와 닿아 있다. 반면 전시장에 닭을 들이고, 우연을 작품의 일부로 삼고, 작품의 경계를 흔드는 방식은 20세기 현대미술의 실험성과 맞닿아 있다. 이강소는 동양적 자연관과 서구적 전위미술의 태도를 자기 몸을 통과시켜, 아주 이강소다운 언어로 바꾸었다.

▲ 이강소 ,〈Becoming-16-C-113〉, 2016, 세라믹, 47 x 18 x 50 cm. [롯데뮤지엄]

 

지난해 대구미술관에서 열린 대규모 회고전 '곡수지유: 실험은 계속된다'도 그런 여정을 보여준 자리였다. 이 전시는 이강소의 반세기 예술세계를 ‘곡수지유’와 ‘실험성’이라는 두 축으로 조망했다. ‘곡수지유’라는 말에는 물이 굽이쳐 흐르는 자리에서 노니는 풍류의 감각이 있다. 자연의 흐름을 받아들이는 정신세계와 특정 형식에 머물지 않으려는 실험정신이 함께 놓인 말이다.

이강소에게 풍류는 멋이 아니라 태도였다. 세계를 붙잡아 세우는 대신 흘러가는 것의 기척을 받아들이는 태도. 동시에 그는 그 흐름을 그저 바라보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그것이 회화가 되고, 조각이 되고, 전시장의 사건이 될 수 있는지를 끝내 실험했다. 아니, 여전히 실험 중이다.

그러니 그의 50년 작업을 하나의 말로 고정하기는 어렵다. 물처럼 흐르다가도 어느 순간 기억이 되고, 비워낸 듯 보이다가도 그 안에서 움직임이 살아난다. 오늘 우리는 너무 많은 이미지와 설명 속에 산다. 무엇이든 빠르게 보고, 빠르게 판단하고, 빠르게 잊는다. 그런 시대에 이강소의 작품은 정답을 서둘러 찾지 말고, 눈앞에 일어나는 것을 가만히 보라고 말한다. 그리고 사라진 것의 흔적이 마음 안에서 다시 움직이는 순간을 기다려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강소: 일어나고 사라지는(Emergence and Dissolution)'이라는 제목은 작품을 설명하는 말이면서 관객의 경험을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강소의 작품 앞에서 우리는 묻게 된다. 마음속에는 무엇이 일어났고, 눈앞에서는 무엇이 사라졌는가.

이강소 개인전 '이강소: 일어나고 사라지는(Emergence and Dissolution)'은 이달 21일~11월 1일까지 서울 잠실 롯데뮤지엄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초기 실험미술부터 현재 작업까지 이어지는 작가의 흐름을 회화, 조각, 설치, 사진, 영상 등 150여 점의 다양한 실체로 만날 수 있는 자리다.

 

토요경제 / 마리아김 문화전문기자 kimjjyy1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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