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용의 고전읽기] '부자 위한 정치’로 급격히 쇠락하다

문화·라이프 / 정해용 / 2015-04-20 10:02:58
99. 주(周) 경왕(敬王)

▲ 정해용 시인
토요경제 상임논설위원


衆心成城 衆口鑠金 중심성성 중구삭금

대중의 마음이 모이면 성을 이루고, 많은 사람의 입이 모이면 쇠도 녹인다 (<國語>周語)

주 천자 경왕이 소액권을 없애자 악관 주구가 백성들의 원망을 경고하면서


천자국인 주(周)나라에서는 경왕(景王) 때에 결정적인 쇠퇴가 시작됐다.

<사기>는 주 왕실의 쇠퇴과정을 매우 간략하게 다루고 있다. <사기>가 생략한 경왕 때의 일을 주 시대 기록인 <국어(國語)>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 나타난 경왕의 치세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부자들을 위한 정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왕은 가장 먼저 소액화폐를 없애고 고액화폐를 늘리는 정책을 썼다. 고액화폐(大錢)를 주조하는 일에 대하여 재상인 선 목공(單穆公)이 만류했다.

“소액 화폐가 불편해져 고액권을 만들어야 하는 건 물가가 올랐을 때 일입니다. 지금 왕께서 소액 화폐를 폐기하고 고액 화폐만 만드신다면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소액 화폐는 쓸모가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백성들의 생활이 궁핍해집니다. 백성이 궁핍해지면 왕의 재용도 궁핍해지고, 백성들은 세금 내기도 어려워 나라를 떠나려 할 겁니다. 물가가 오른 뒤에 해도 될 일을 먼저 이렇게 하시는 것은 나라를 위태롭게 만들 겁니다. 주나라는 오늘날 실로 나약한 나라가 되었는데, 민생마저 어렵게 만들어 떠나게 만드는 것은 나라에 재앙을 더하는 일입니다. 이를 어찌 국가경영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두려워할 일입니다.”

그러나 경왕은 재상의 만류를 무시하고 고액권을 만든 다음 소액 화폐들을 폐기했다.

그리고는 폐지되는 소액권 동전들을 녹여 엄청나게 큰 종을 만들게 했다. 자신의 치적을 보여주려는 사업이었다.

선목공이 다시 반대하자 악사 주구(州鳩)에게 물었다. 주구 또한 비판했다.

“백성의 재물을 궁핍하게 하여 힘 빠지게 하면서 자기 치적을 내세우기 위한 사업만 펼치려 하십니까. 종을 만들더라도 화음을 이루지 못하고 표준에도 맞지 않는 물건이므로(聽之不和 比之不度) 교화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뿐더러 민심은 이반되고 하늘은 노할 것입니다(離民怨神).”

경왕은 다시 무시하고 고집스레 대종의 주조를 명령했다.

경왕이 일을 맡은 사람들에게 ‘화음을 이룰 수 있겠지?’라고 묻자 제조공들은 ‘화음을 이룰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경왕은 주구에게 이를 자랑삼아 말했다. 하지만 주구는 굴하지 않고 다시 경고했다.

“백성이 즐겁게 여긴다면 그것이 곧 화음(民備樂之則爲和)을 얻는 것입니다. 지금 국가의 재물은 바닥나고 민생은 피폐하여 원한을 품지 않은 자가 없는데, 그것이 과연 화음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더구나 백성들이 무리 짓기를 좋아하는 바, 이것은 무리를 지음으로써 자신들의 뜻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증오심이 모이면 끝장을 보기 전에는 사그러들지 않을 것입니다. 속담에도 ‘많은 사람의 마음이 모이면 성을 쌓을 수 있고, 많은 사람들의 입방아가 모이면 쇠도 녹인다’고 했습니다. 3년 동안 백성들의 쇠붙이(돈)를 가지고 두 번이나 큰일을 벌이셨으니 한 가지라도 재앙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신은 두렵습니다.”

경왕은 주구에게 “그대는 늙었구려, 무얼 안다고 그러는가.”라고 핀잔했다. 그러나 왕은 이듬해에 죽었고 종은 끝내 화음을 내지 못했다.



이야기 PLUS

고액권 화폐의 발행은 국가 경제나 재정의 외형을 늘리는 데는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물가의 상승과 연관된다는 점에서 보면 민생에 도움 되는 일은 결코 아니다. 아직 많은 백성들이 잔돈을 주로 사용하고 있을 때 고액권 발행을 원하는 사람들은 필경 부자들일 것이다. 경왕은 소액권을 없앴을 뿐 아니라 그것으로 엄청난 크기의 종을 만들어 자기 치적을 남기고 싶어 했다. 막대한 재정이 소모될 것은 당연하다. 올바른 관리라면 반드시 반대할 수밖에 없다.

경왕은 심지어 신하들을 다 참여시켜 사냥을 나가면서 선자(선목공)를 죽이려고 했지만 오히려 자신이 죽었다. 그의 죽음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없으나, 그 직후 세 왕자가 서로 죽고 죽이면서 치열한 대권다툼을 벌인 것으로 보면 만년이 결코 순탄치 못했던 것 같다.

선목공의 아버지 선정공은 진(晉)나라 숙향이 만나보고 “기울어진 주나라에 이런 재상이 있다니 주나라가 다시 흥하려나”하며 놀랄 정도로 반듯한 군자였다.

그러나 경왕은 그 복을 누리지 못했고, 주 왕실은 그대로 기울었다.

본래 경왕은 총명했던 태자가 일찍 죽자 조(朝)를 태자로 세우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붕어했다. 그러자 다른 아들 개(丐)가 무리를 이끌고 왕권을 다투어 후계가 복잡해졌다. 대부들이 다툼을 끝내기 위해 경왕의 큰아들 맹을 왕으로 옹립하였으나 왕위를 탐낸 조가 맹을 죽여버렸다.

이에 진(晉)나라 제후 경공(傾公)이 군대를 보내 조를 몰아내고 왕자 개를 옹립하니 그가 경왕(敬王)이다. 왕자 조는 신하의 자리로 물러섰다가 10년이 지나 진 경공이 서거하자 다시 난을 일으켰다. 진 경공의 아들 정공이 다시 경왕을 복위시켰다.

주나라의 입장에서 볼 때 진나라는 천자의 신하인 제후일 뿐이다. 오죽하면 제후가 나서서 천자를 세우고 몰아내고 했겠는가. 그만큼 천자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는 의미다.



백성이 즐겁게 여긴다면 그것이 곧 화음입니다. 재정은 바닥나고 민생은 피폐하여 원한을 품지 않은 자가 없는데, 그것이 과연 화음이겠습니까. 백성의 증오가 모이면 끝장을 보려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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