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연문희, 누드 크로키의 인생 변주(變奏)

문화·라이프 / 김병윤 기자 / 2023-10-24 04:14:11
▲ 고요가 비처럼 내려 I, 2017, Ink & Watercolor on paper, 50×35cm

 

간절하면 이루어진다. 인생사가 그렇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했다. 땀은 배신이 없다. 땀 흘린 만큼 거둬들인다.

간절함으로 꿈을 이룬 화가가 있다. 연문희(56) 화가다. 누드크로키를 그린다. 화단에서 인정받는 실력파다.

연문희는 패션디자인을 전공했다. 패션디자이너로 활동했다. 1997년 국제패션쇼 디자인 콘테스트에 출품했다. 장소는 루브르 박물관이었다. 반응이 좋았다. 이탈리아 마랑고니 장학생으로 선발됐다. 패션계의 주목을 받은 유망주였다.

▲ SPECTRUM series, 2017, Watercolor on paper, 36×51cm 란제리 업체 초정으로 즉석에서 시연한 크로키 시리즈 작품

 

연문희는 누드크로키에 운명처럼 입문했다. 패션을 연구하다 인체에 관심이 쏠렸다. 가식 없는 육체를 그리고 싶었다. 틈틈이 누드를 그렸다. 직장생활의 빈 시간을 활용했다. 점심도 굶어가며 누드 크로키를 습작했다.

작업이 즐거웠다. 직장을 그만뒀다. 2000년에 본격적으로 누드를 그렸다. 작업실에 모델을 초청했다. 모델의 인체를 그리는 매력에 빠졌다. 인간 본연의 모습을 보았다. 원초의 모습에 몰입됐다. 잡념이 없어졌다. 어느 순간 취미가 일이 됐다. 일이 작품으로 변모했다.

처음에는 힘들었다. 모델을 구하기 어려웠다. 사람들의 편견이 심했다. 시선도 곱지 않았다. 색안경을 쓰고 보았다. 비웃는 사람도 있었다. 왜 누드를 그려. 이런 분위기였다. 신경 쓰지 않았다. 눈 감고 귀 막았다. 묵묵히 연필을 굴렸다. 분위기가 바뀌어 갔다. 누드크로키에 대한 인식이 좋아졌다. 멋진 예술로 인정받았다. 선입견을 깨뜨렸다며 찬사를 받았다.

연문희의 크로키는 독창성이 있다. 크로키는 선이 중요하다. 선의 개념을 면으로 확대했다. 선을 면으로 단순하게 표현했다. 화구의 변화를 활용했다.

처음에는 연필로 그렸다. 점차 드로잉 재료가 바뀌었다. 콩테9Conté), 목탄, 펜, 나무젓가락, 수채물감, 아크릴물감으로 다양해졌다.

 

▲ FLOW series, 2009, Ink on paper, 70×43cm 크로키 후, 디지털 효과를 주어 완성한 작품

 

2008년부터 5분 크로키를 주로 그렸다. 누드크로키는 쉬운 작업이 아니다. 순간적 폭발력이 필요하다. 모델에게서 나오는 몸의 표정. 행복한 모습. 인체의 오묘한 구성 등. 모든 것을 5분 안에 완성해야 한다.
연문희는 2020년 누드크로키 책을 출간했다. 20년간 꿈에 그렸던 작업이었다. 책 속에는 화풍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색채의 바뀜이 나타난다. 모델의 대상도 바뀌었다. 삶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연문희는 모델을 통해 삶을 배웠다. 초창기에 만났던 모델이다. 스포츠댄스와 모델 일을 겸했었다. 젊고 탄탄한 몸매였다. 짙은 화장과 빨간 립스틱. 탱탱한 얼굴.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 고뇌의 시간 series, 2017, watercolor on paper, 36.5×25.6cm

 

그때의 모델을 우연히 16년 만에 만났다. 모델은 중년이 돼 작업실을 찾았다. 젊은 시절의 모습은 사라졌다. 흐트러진 머리. 화장기 없는 얼굴. 탄력 없는 피부. 축 처진 엉덩이. 어두운 안색. 삶에 찌든 모습이었다. 세월의 흐름이 그녀를 바꾸어 놓았다.

연문희는 모델의 바뀐 모습에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삶의 무거움을 배웠다. 세월의 연륜을 느꼈다. 미래의 자신 모습을 가꾸기로 했다. 성찰의 시간을 갖게 됐다.

연문희에게 누드크로키는 어떤 것일까. 삶 그 자체다. 과거를 돌아보게 한다. 미래를 설계하게 된다. 인생 여정의 이정표다.

연문희의 누드크로키는 예술이다. 에술 만이 아니다. 인생이다. 

 

토요경제 / 김병윤 기자 bykim716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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