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1392년 조선이 건국된 이래 600년 넘게 수도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서울은 그렇게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였다. 서울을 이해한다는 건 결국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에 다가선다는 뜻일 게다. 이 연재는 '찐 서울 토박이'자 '대한민국 연예1호' 기자로 불리는 정홍택 선배의 구술을 기초 삼아 김병윤 대기자가 꼼꼼히 현장을 누비며 쓴 글이다. 김 병윤 대기자가 전하는 생동감 넘치는 서울 이야기를 '토요경제 17주년 특별기획'으로 본지에서 매주 2회 독자에게 전하려 한다. [편집자 주] |
여유로웠던 시절 ‘서울의 정자’
조선시대에는 정자가 많았다. 120~130개 정도가 있었다. 3분의 2가 한강변에 자리 잡았다. 정자는 절경에 있어야 제 멋이 났다. 한강의 절경을 느낄 수 있었다. 한강을 바라보며 시를 읊었다. 붓끝을 휘갈겼다. 기녀의 춤을 감상했다. 술 한 잔을 곁들였다. 풍류를 즐겼다. 시원한 바람과 함께.
정자는 여러모로 활용됐다. 임금이 쉬기도 했다. 연회장으로도 쓰였다. 도성 안에도 있었다. 활 쏘는 장소로도 사용했다.서울에는 아직도 몇 개의 정자가 남아있다. 제각기 사연을 안고 있다. 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인조반정의 결의를 다진 ‘세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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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검정 <사진=김병윤 대기자> |
남아있는 정자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6각의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역사의 장소이기도 하다. 명칭 그대로다. 칼을 씻은 자리다. 조선시대 인조반정 사건이다. 광해군의 폐위를 의논했다. 거사의 동지들이 칼을 씻었다. 결의를 다지기 위해.
계곡의 물이 깨끗했다. 예전에는 간장과 한지를 만들었다. 물이 좋아야 만들 수 있는 제품들이다. 조선시대에는 다용도로 사용됐다. 군인의 위락장소로 이용됐다. 시인과 묵객도 즐겨 찾았다. 주변의 풍광이 뛰어났다. 웅장한 산과 계곡이 조화를 이뤘다. 시상이 저절로 떠올랐다. 붓끝이 자연스레 춤을 췄다. 세태를 논하기도 좋았다.
1960~70년대에도 사람이 많이 찾았다. 더위를 달래기 위해. 주변의 산세도 좋다. 북악산과 북한산의 정기를 담고 있다.
정조의 효심이 담긴 ‘용양봉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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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양봉저정 <사진=김병윤 대기자> |
조선 정조 임금의 효심이 담겨져 있다. 지금도 잘 보존되고 있다. 한강대교에서 가다보면 보인다. 잠실 쪽으로 가면 오른 쪽에 자리 잡았다. 정조는 아버지를 그리워했다. 사도세자의 한을 달래려 노력했다. 산소에 자주 들렀다. 가는 길에 발걸음을 잠시 쉬었다. 용양봉저정에서 숨을 골랐다. 정조가 좋아했던 정자였다. 정조의 마음을 달래줄 최적의 장소였다. 흐르는 한강 물을 보며 애달픔을 달랬다. 뒤주 속에 갇혔던 아버지를 떠올렸다. 사도세자는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죽었다. 목이 말라 고통 속에 떠났다.
한강의 물을 보며 아버지를 생각했다. 눈앞에 펼쳐진 물의 잔치가 원망스러웠다. 눈물을 머금은 채 한강을 바라봤다. 주변의 신하들은 숨을 죽였다. 임금의 애달픈 사부곡에 몸을 조아렸다. 그 순간 정조는 임금이 아니었다. 아버지를 그리는 효심 가득한 평민의 아들이었다. 신하들은 임금의 효심에 보답하고 싶어 용양봉저정을 크게 만들었다. 임금에 대한 충성심이었다. 아버지를 편히 그릴 수 있게 지었다. 용양봉저정은 우리에게가르친다.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부모는 머물지 않고 한강의 물처럼 흘러간다고.
대원군의 권세에 주인이 바뀐 ‘석파정(石坡亭)’
대원군의 권세가 남아있다. 석파정은 조선 철종 때 영의정 김흥근의 소유였다. 원래는 삼계동정사라 불리었다. 지금의 부암동에 있다. 대원군이 반 강제적으로 빼앗았다. 대원군의 호가 석파다. 명칭이 바뀌었다. 석파정이라고.
석파정은 정말 좋은 집이다. 집에는 두 종류가 있다. 살기 좋은 집이 있다. 보기 좋은집이 있다. 석파정은 두 가지 요소를 다 갖추고 있다. 그래서 정말 좋은 집이다. 풍경마저 아름다웠다. 물소리 새소리가 화음을 맞췄다. 사계절의 변화를 한 눈에 느낄 수 있었다. 대원군은 석파정을 갖고 싶어 욕심을 냈다. 석파정을 팔라했다. 김흥근은 거절했다. 대원군은 난감했다. 고민을 했다. 묘책을 냈다. 아들 고종을 내세웠다. 임금을 하루 재웠다. 김흥근은 신하의 도리를 하려 했다. 임금이 잔 자리를 신하가 소유할수 없었다. 삼계동정사에 발을 끊었다. 자연스레 대원군의 집이 됐다.
대원군은 왜 석파정을 탐냈을까. 나름대로 상상해 본다. 속뜻이 있지 않았을까. 안동김 씨 세력이 대단했다. 그 세력을 꺾으려 했던 거 아닐까. 대원군의 속셈은 알 수가없다. 분명한 점은 있다. 대원군이 찬탈했다는 것이다. 다행인 것도 있다.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조금의 변화만 있을 뿐이다. 세도가의 생활상을 느끼게 해준다. 권불십년의 허무함도 알려준다.
고종이 자주 들렀던 ‘황학정’
활을 쏘는 곳이다. 고종이 많이 다녀갔다. 1898년에 지어졌다. 어명으로 만들어 졌다. 한말에는 도성 안에 5곳의 사정이 있었다. 서쪽에 위치했었다. 서촌오사정(西村五射亭)이라 했다. 모두가 사라졌다. 황학정만 남아있다. 현재도 활터로 사용되고 있다.
조선시대 정자는 대부분 오래 전에 건축됐다. 역사가 깊고 강과 산에 자리 잡았다. 풍류를 즐기기 위해서다. 황학정은 역사가 짧다. 구한말에 건립됐다. 풍류와는 거리가 멀다. 궁술연습을 위한 장소였다. 군의 훈련 장소였다. 쇠락해가는 구한말의 우국충정이 담겨있다. 황학정의 시위소리는 환상이다. 활을 떠난 화살이 허공을 가른다. 궁사의 목표를 향해 거침없이 돌진한다. 거칠 것이 없다. 시위 소리는 산에 부딪힌다. 그 소리가 되돌아온다. 애간장을 녹이는 소리다.
토요경제 / 김병윤 대기자 bykim716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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