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경제 17주년 특별기획] 서울 토박이가 말하는 진짜 '서울 이야기'(28)

서울이야기 / 김병윤 기자 / 2022-04-08 23:51:50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미아리고개’, 영화 아리랑을 촬영한 ‘아리랑고개’, 정조임금이 자주 다녔던 ‘장승배기’, 여우가 많았던 ‘남태령고개’, 얼음을 보관했던 ‘서빙고고개’,

서울은 1392년 조선이 건국된 이래 600년 넘게 수도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서울은 그렇게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였다. 서울을 이해한다는 건 결국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에 다가선다는 뜻일 게다. 이 연재는 '찐 서울 토박이'자 '대한민국 연예1호' 기자로 불리는 정홍택 선배의 구술을 기초 삼아 김병윤 대기자가 꼼꼼히 현장을 누비며 쓴 글이다. 김 병윤 대기자가 전하는 생동감 넘치는 서울 이야기를 '토요경제 17주년 특별기획'으로 본지에서 매주 2회 독자에게 전하려 한다. [편집자 주]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미아리고개’ 

▲ 미아리고개의 유래가 담긴비석 <사진=김병윤 대기자>

 

아픔이 많은 고개다. 현대사의 비극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중국군이 많이 넘나들었다. 병자호란 때 중국군이 넘어왔다. 되너미 고개라고도 한다. 병자호란 때 붙여진 명칭이다. 되너미가 무슨 뜻일까. 중국인을 비하하는 말이 숨어있다. 되놈이다. 되놈이 넘어온 길의 뜻을 품고 있다.

6.25의 상흔도 간직하고 있다. 중공군과 북한군이 쳐들어왔다. 미아리고개를 통해 도망갔다. 총알이 빗발쳤다. 육중한 탱크소리가 지축흔들었다. 수많은 사람이 불귀의 객이 됐다. 자식을 잃은 부모. 부모를 잃은 어린 자식. 울부짖는 소리가 뒤엉켰다. 죽은 자는 말이 없었다. 굳은 시신은 꼼짝도 안했다.차가운 시신을 부여잡고 혼절했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라는 노래가 있다. 단장(斷章)이 무엇인가. 창자가 끊어진다는 뜻이다. 한국가요에 이보다 더 슬픈 노래는 없다. 실화다. 작사가 반야월이 부산으로 피난 갈 때 일이다. 부인과 딸을 잃어 버렸다. 부인은 나중에 만났다. 딸은 미아리고개에서 죽었다. 반야월은 할 말을 잃었다. 정신이 나갔다. 딸을 잃은 애비의 마음을 알겠는가.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이었다. 평생을 아파하며 살았다.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목숨이었다. 미아리고개가 원망스러웠다.

반야월은 가사를 써 내려갔다. 다시 못 볼 딸을 생각하며. 그 노래가 단장의 미아리 고개다. 드라마도 이럴 수는 없다. 가족의 슬픔이다. 민족의 아픔이다. 미아리 고개의 숙명이다.

미아리고개는 사람이 뜸했다. 고개를 넘기가 무서웠다. 밤이면 더 그랬다. 큰 공동묘지가 있었다. 고개에는 스산한 기운이 있었다. 죽은 사람의 영혼이 떠다니는 듯했다.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도깨비불도 나온다 했다. 많은 사람이 봤다 했다. 혹시 반딧불이었는지도 모른다. 서울시민은 불편했다. 미아리고개를 넘나들기가.

서울시는 묘지를 이전하기로 했다. 4.19 이후 개발에 들어갔다. 큰 어려움이 따랐다. 보상도 해줘야 했다. 문제가 생겼다. 무연고 묘지의 이전이었다. 산소를 무조건 파헤칠 수는 없다. 죽은 자의 유택을 마음대로 건드릴 수 없다. 한국사회는 유교사상이 남아있다. 죽은 자를 잘 모셔야 한다. 조상 숭배사상이 뿌리 깊다.

 

서울시는 무연고 묘지의 주인을 찾아야 했다. 공고를 냈다. 일정조건을 내세웠다. 여기서 비리가 생겼다. 이 사람 저 사람 모두가 나섰다. 자신이 연고자라 주장했다. 아무 연관도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방법이 없었다. 조건을 갖춘 사람에게 보상을 했다. 많은 돈이 나갔다.

서울시를 복마전이라 했다. 그때 생겨난 말이다. 미아리고개에는 점집이 많다. 왜 그럴까. 전쟁의 후유증이다. 전쟁 직후 사람들은 약해졌다. 눈앞에서 주검을 많이 봤다. 가족과도 헤어졌다. 생사라도 알고 싶었다. 의지할 데가 없었다. 무언가에 의지하고 싶었다. 실오라기라도 잡고 싶었다. 점집을 찾았다. 미아리고개로 점집이 몰렸다, 죽은 자의 영혼을 달래기에 딱 맞았다. 공동묘지에 잠들었던 영혼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직도 미아리고개에는 점집이 많다.

미아리 고개는 묵묵히 바라봤다. 동족의 쓰라린 상처를. 망자의 한도 품고 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무덤은 무엇인가. 죽은 자에 대한 산 자의 지극한 정성이 모아진 장소이다. 무덤은 결코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힘든 삶의 여정을 끝낸 사람이 편히 쉬는 곳이다. 

영화 아리랑을 촬영한 ‘아리랑고개’

원래는 미아리고개에 속했다. 명칭이 왜 바뀌었을까. 영화 아리랑 때문이다. 1926년 영화 아리랑이 개봉됐다. 나운규 감독·주연이다. 민족정기를 불어넣는 영화다. 아리랑을 촬영한 고개다. 그때부터 아리랑고개가 됐다. 아리랑은 초창기에 몇 번 상영됐다. 나중에 상영이 금지됐다.

일제가 상영을 못 하게 했다. 필름이 없어졌다. 지금도 필름을 못 찾고 있다. 일본인이 가져갔다는 소문이 돌았다. 필름을 찾기 위해 수소문 했다. 관계자들이 일본까지 찾아갔다. 끝내 못 찾았다. 아리랑고개는 영화의 길로 지정됐다. 영화 아리랑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돈암동에서 고개 마루까지다.

아리랑고개와 연관해 알아야 할 곳이 있다. 정릉이다. 아리랑고개와 가깝다. 정상 바로 옆에 능이 있다. 이성계의 후궁 신덕왕후가 묻혀있다. 원래는 지금의 정동에 있었다. 태종 이방원이 정권을 잡았다. 조선 3대 임금에 올랐다. 태종은 신덕왕후 능이 거슬렸다. 도성 안에 있는 것이 싫었다. 이장을 시켜 지금의 장소로 옮겼다.

당시의 정릉은 산골이었다. 허허벌판이었다. 사람의 발길조차 없었다. 비석은 광교 다리로 썼다. 이성계는 죽었다. 신덕왕후도 떠났다. 태종도 없어졌다. 모두가 사라졌다. 태종은 알았을까. 권불십년의 단순한 이치를. 죽은 자의 잠자리를 파헤쳐야만 했을까.

정조임금이 자주 다녔던 ‘장승배기’
장승이 박혀있다는 뜻이다. 지금의 상도동. 노량진동이다. 예전에는 숲이 울창했다. 인가도 없었다. 적막했다. 이 길을 지나기 쉽지 않았다. 길이 험했다. 이런 길을 다닌 임금이 있었다. 정조임금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그리워했다. 아버지 묘소인 수원에 자주갔다. 수도도 화성으로 옮기려 했다. 가는 길에 잠시 어가를 세우고 명령했다. 장승을 세우라고. 어명이었다. 2개의 장승이 세워졌다.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장승은 원래 여자를 세우지 않는다. 임금의 명이라 어쩔 수 없었다.

장승배기에는 노래의 사연이 있다. 노들강변이다. 노들강변은 원래 상도동과 제1한강교 부근이다. “노들강변 봄버들. 휘휘 늘어진 가지에다가.” 많이 알려진 노래다. 노들강변은 가요다. 엄밀히 말하면 민요가 아니다. 민요화 된 노래다. 민요는 작사 작곡가가 없어야 된다. 몰라야 한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아리랑 같은 노래다. 노들강변은 아니다. 작곡가 있다. 문호월 작곡이다. 작사자는 확실치 않다. 신불출 이라는 의견도 있다. 확실치 않다. 문호월의 자손이 훌륭하다. 미국에 살고 있다. 노들강변의 저작권을 포기했다. 국민애창곡인데 어찌 돈을 받겠냐고 했다. 고마운 일이다.


여우가 많았던 ‘남태령고개’

▲ 남태령 <사진=김병윤 대기자>

 

남태령고개는 산적 고개였다. 산적이 들끓었다. 큰길이었다. 고개도 높았다. 한양에 가려면 과천부터 기어간다 했다. 그처럼 험한 고개였다. 여우고개라고도 했다. 여우가 엄청 많았다. 조선후기 때 군인의 훈련 장소였다. 지금도 수도방위사령부가 있다. 수도 서울을 굳게 지키고 있다. 예사롭지 않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킨다는 게.

얼음을 보관했던 ‘서빙고고개’
빙고가 무엇인가.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다. 조선조 후기에 만들었다. 얼음을 저장할 필요가 있었다. 한강에 얼음이 얼었다. 그 얼음을 보관해야 했다. 적합한 장소가 필요했다. 한강과 가까워야 했다.

지금의 서빙고동이 적합했다. 서빙고가 동빙고보다 8배컸다. 작은 고개가 5곳이 있었다. 그 고개에 땅을 파고 창고를 만들었다. 얼음을 옮기기에 가까웠다. 얼음을 톱으로 썰어 옮겼다. 마차로 실어 날랐다. 보관하기도 좋았다. 귀한 얼음을 지켜야 했다. 빙관(氷官)이 생겼다. 얼음을 지키는 공무원이었다. 위세가 대단했다. 책임도 막중했다. 임금의 진상품을 지키는 업무였다.

원래 한강은 청정수였다. 오염이 안 됐다. 겨울날씨도 매우 추웠다. 매서운 바람이 불어 손발이 꽁꽁 얼어붙을 정도였다. 얼음이 잘 얼었다. 얼음은 가운데서 얼기 시작해 밖으로 퍼져 나갔다. 얼음 색깔이 푸르렀다. 파란 색이 났다. 깊은 곳에서 얼어 버렸다. 천연얼음은 생명력이 길어 인공 얼음보다 오래 간다. 늦게 녹는다. 한강의 얼음은 1950~60년대 까지 팔렸다. 서빙고에서 보관하다 팔았다.

 

토요경제 / 김병윤 대기자 bykim716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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