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경제 17주년 특별기획]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지붕 없는 박물관 '군산 이야기'(2)

군산이야기 / 김병윤 기자 / 2022-05-06 23:02:46
수탈의 관문 '군산세관', 수탈의 통로 '군산내항'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 대한민국 근현대사는 아픔과 고난의 연속이다. 그 가운데 일제강점기는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일제는 36년간 우리의 삼천리 금수강산을 수탈하고 농락했다. 군산은 그런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대표적인 도시다. 김병윤 대기자는 지난 100여 일 이런 아픔의 도시 군산의 이곳저곳을 돌았다. 그리고 다시 웅비하는 군산을 목도했다. 김병윤 대기자가 둘러본 ‘군산 이야기’를 ‘토요경제 17주년 특별기획’ 일환으로 매주 2회 독자에게 전하려 한다. [편집자 주]

 

수탈의 관문 군산세관 

▲ 군산세관 본과 <사진=김병윤 대기자>

 

군산세관(群山稅關)’은 수탈의 관문이었다. 아픔의 장소다. 이곳의 업무는 3가지로 구분됐다항만 유지관리, 외국산 수입품에 대한 부과징수. 수탈한 물건의 반출이었다. 세관 근무자는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일본인이 한일강제병합전부터 광복 때까지 세관장을 맡았다. 군산세관의 중요성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일제 수탈의 핵심은 쌀이었다반출은 주로 군산세관에서 이뤄 졌다. 호남평야에서 생산한 질 좋은 쌀은 대부분 일본 관서지방으로 보내졌다. 당시 수탈당한 쌀의 규모는 상상을 불허한다1933년 당시 국내 쌀 생산량은 1630만 석이었다. 이해에만 국내 생산량의 절반이 넘는 870만 석이 일본으로 흘러갔다. 이 가운데 군산세관을 통해서만 228만 석이 빠져나갔다. 이는 당시 국내 쌀 총생산량의 14%로 전체 수탈당한 쌀의 26%나 되는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 일제시대 군산세관 조형 <사진=김병윤 대기자>

 

우리 국민은 식량부족으로 고통받았다. 먹을 쌀이 없었다. 주린 배는 만주에서 수입한 조와 수수로 달랬다. 조와 수수는 신석기시대에나 먹던 식량이다. 이마저도 못 먹을 때가 있었다. 급기야는 잡초인 를 먹었다. 피는 벼 옆에 자라는 잡초다. “피죽도 못 먹었냐.”는 말이 그 뜻이다.

 

노동력 착취도 심했다. 월급은 쥐꼬리만큼 줬다. 부두 노동자는 중노동에 시달렸다. 일제는 선적과 하역 작업을 거칠게 몰아붙였다. 2가마(160kg)를 어깨에 짊어져야 했다. 심할 때는 3가마도 지어야 했다. 힘이 모자라 쓰러지는 일이 많았다. 노동자는 분노했다. 파업이 자주 발생했다. 일본인은 근본적 해결책을 내놓지 않았다. 이 때문에 파업은 악순환했다.

 

일본에서는 공산품과 소비재가 주로 들어왔다. 관세는 어김없이 부과했다. 화학비료 수입이 많았다. 우리 농민에게 비싼 값으로 공급했다. 쌀 증산을 위한 일제의 책략이었다. 일제는 산미증식계획을 세웠다. 쌀 증식을 위해 밭을 논으로 바꿨다. 부족한 지력은 화학비료로 보충했다. 일제는 한국의 비옥한 옥토마저 산성화시켰다.

 

군산세관 본관은 국내 3서양고전주의건축물로 인정받는다. 서울역, 한국은행본점 건물과 함께. 군산세관은 현재 호남관세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수탈의 통로 군산내항

▲ 군산내항 뜬다리 <사진=김병윤 대기자>

 

군산항 뱃고동 소리는 조선인의 절규였다. 저항의 소리였다. 일제는 군산항에 대규모로 투자를 했다. 수탈한 물품을 빨리 수송하기 위해. 모두 4차례에 걸쳐 축항사업을 펼쳤다. 1905년부터 1938년까지였다. 목적은 오직 한 가지. 쌀을 실어 가기 위해서다.

 

중요 시점은 3차 사업이다. 1926년에서 1933년까지 이뤄졌다. 쌀 수탈이 극에 달하던 시점이었다. 3천 톤급 선박 3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었다. 당시로는 대규모시설이었다

 

최신 공법을 사용했다. 이른바 뜬다리 부두(부잔교) 건설이다. 뜬다리 부두는6·25 때 폭파됐다. 1953년에 복구됐다뜬다리 부두는 수면 높이에 따라 다리가 위아래로 자유롭게 움직이는 방식이다. 네모진 모양의 배를 연결해 띄웠다. 육상 연결부가 조수 간만의 차이에 따라 회전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육지에서 선박을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

 

수탈한 쌀은 뜬다리를 통해 일본 선박에 실려 나갔다. 그 모습을 본 농민의 심정은 어땠을까. 가슴을 때리며 통곡했으리라. 어쩌면 수탈당한 쌀도 눈물을 흘렸으리라. 쌀눈이 떨어지도록 몸을 뒹굴었을 게다. 엄마 잃어버린 아이처럼. 시집가는 어린 새색시같이.

 

일제는 뜬다리 부두 건설을 위해 자연마저 파괴했다. 군산항 주변에 있는 산을 허물었다. 돌을 공급하기 위해서다. 수덕산, 동령산 등 돌산이 사라졌다. 흔적조차 없어졌다. 바다와 조화를 이루던 군산시민의 휴식처가 사라졌다.

 

일제는 1926‘3차축항사업기공식 때 대규모 축하행사를 했다. ‘사이토 총리방문에 맞춰서다. 축하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쌀 탑이 세워졌다. 높이가 12m에 달했다. 쌀가마 800개가 들어간 엄청난 크기였다. 농민의 피와 땀을 착취해 쌓은 전시물이었다. 탑을 쌓는데도 우리 국민을 동원했다.

 

일제는 쌀가마니 짜는데도 우리의 노동력을 착취했다. 수탈한 쌀을 가져가기 위해서다. 농사짓기에도 힘든 현실이었다.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가마니를 짜야 하는 참담한 현실이었다.

 

일제의 야욕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36년에 ‘4차축항사업을 시작했다. 1938년까지 2년간 공사를 했다. 이 공사로 3천 톤급 선박 6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었다. 대형 뜬다리 3기도 추가로 건설했다. 6기지만 지금은 3기만 남아있다. 이 모두가 태평양전쟁에 군수물자 공급을 위해 만들었다.

 

군산항은 1899년 개항했다. 군산항을 바라볼 때 우리는 느껴야 한다. 지금이 개항시대보다 더 심각한 위기의 시간이란 걸. 120년 전 격동의 시기보다 더 큰 어려움이 닥쳐온다는 걸

 

코로나19’라는 질병이 창궐했다. 주변의 강대국들은 한반도를 또다시 세력다툼의 장으로 만들고 있다. 조선말기와 같이 외세침략의 조짐마저 보인다. 국제사회는 냉정하다. 영원한 벗도 없고 적도 없다. 스스로 힘을 키워 대비할 수밖에 없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광복 후 우리의 어르신들은 경고했다. “미국 놈 믿지 마라. 소련 놈에게 속지 마라. 일본 놈 일어난다.” 현실이 그렇게 가는 듯하다. 어르신들의 말씀에 경각심을 갖게 된다.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자각하면 된다. 준비하면 된다.

 

군산항은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치욕스러운 역사를 썰물처럼 흘려보내서는 안 된다고. 밀물처럼 몰려오는 열강의 다툼에 대비해야 한다고.

 

토요경제 / 김병윤 대기자 bykim716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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