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가 미래다] 절망적 현실에서 '희망' 찾는 귀화 조선족 노해옥 씨

다문화가 미래다 / 김병윤 기자 / 2022-10-11 13:34:22
학교 동창인 남편의 진심 어린 마음에 맺어진 두번째 결혼... 진정한 행복을 느껴
결혼식 2개월 만에 남편은 건설현장 사고로 머리를 크게 다쳐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웃돕기 봉사활동과 강사 활동하면서 '행복한 가정의 꿈' 놓지 않아
▲ 귀화 조선인 노해옥 씨와 남편 남순철 씨 <사진=노해옥 씨>

 

“어떻게 저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어요. 믿어지지 않아요. 10개월간의 짧았던 행복이 꿈만 같아요. 저에게 다시 행복이 찾아 올 수 있을까요. 아마도 다시 돌아올 수 없는 행복이라 생각됩니다.”

귀화 조선족 노해옥(49) 씨의 애달픈 사연이다. 노 씨는 헤이룽장성 출신이다. 중국 국적을 갖고 있었다. 2001년 3월 한국에 왔다. 전 남편이 한국행을 권유했다. 그 당시에는 결혼하지 않은 상태였다. 연인 사이였다. 전 남편이 먼저 한국에 들어왔다. 전 남편도 조선족이었다. 베이징의 호텔에서 같이 근무했다.

연인을 따라 온 한국생활. 모든 것이 낯설었다. 한국말도 전혀 몰랐다. 중국에서는 중국말만 썼다. 중국 학교를 다녔기 때문이다. 믿을 사람은 연인밖에 없었다. 2002년 12월 결혼했다.

결혼생활이 순탄하지 않았다. 성격차이가 심했다. 부부싸움이 잦았다. 2013년 이혼했다. 자신과 5살 딸의 행복을 위해서였다. 딸 에게 싸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홀로서기에 들어갔다. 딸 취학 전에 일거리를 찾았다. 롯데백화점 면세점에서 5년간 근무했다. 코로나로 인해 퇴사했다. 어린 딸은 친정엄마가 돌봐 줬다. 몸은 피곤해도 마음이 편했다.

주위의 도움도 큰 힘이 됐다. 딸이 부천 어린이집에 입학했다. 경쟁이 치열했다. 추첨으로 원생을 결정했다. 합격했다. 행운이었다. 정말 기뻤다. 합격통지서를 받고 밤새 울었다. 합격의 기쁨도 잠시. 원비가 부담이 됐다. 매월 40만 원의 원비를 내야 했다. 힘들게 1년간 원비를 냈다.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어린이집 원장이 면담을 신청했다. 원장이 수녀였다. 노 씨의 형편을 알았다. 수녀 원장이 원비를 내지 말라 했다. 기쁨과 감사의 눈물이 흘러 내렸다. 한국사회의 정에 흠뻑 빠졌다.

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딸의 학교생활이 걱정됐다. 중국 엄마라고 차별 당할 것 같았다. 왕따를 당할까 두려웠다. 한국 국적을 취득하기로 했다. 노력에 노력을 거듭했다. 귀화시험에 합격했다. 2017년 대한민국 국민이 됐다. 딸에게 귀한 선물을 주었다.

▲ 노해옥 씨의 행복한 가족 여행 <사진=노해옥 씨>


행운은 계속 이어졌다. 2018년 3월 현재의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학교 동창이다. 중국 동창생들의 단체 방에서 연락이 됐다. 남편도 한국에 와 있다고 했다. 반가웠다. 만남이 이뤄졌다. 옛 시절 얘기로 웃음꽃을 피웠다. 숨김이 없었다. 부담도 느끼지 않았다.

남편도 이혼 한 상태였다. 서로의 사정이 비슷했다. 남편이 어느 날  진지하게 말했다. 서로 의지하며 살자고. 학교 다닐 때부터 당신을 좋아 했다고 말했다. 청혼이었다.

노 씨는 거절했다. 딸 때문이었다. 남편이 계속 설득했다. 진심이 묻어 났다. 마음이 흔들렸다. 딸에게 물었다. 그 아저씨 어떠냐고. 딸이 환하게 웃었다. 나도 그 아저씨 좋다고. 새 아빠가 생기면 좋겠다고 했다.

노 씨는 남편을 만나자고 했다. 사실 나도 학교 다닐 때부터 당신이 좋았다고 밝혔다. 청혼을 받아 들였다. 남편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2018년 11월 결혼했다. 적십자사 주선으로 합동결혼식을 올렸다. 반지하에서 신혼생활을 했다. 남편의 사랑이 지극했다. 꿈에 그리던 결혼생활이었다. 아파트도 장만했다. 남편과 자신이 모은 돈을 합했다. 은행대출도 일부 받았다. 집에 웃음꽃이 활짝 폈다. 딸이 얘기했다. 태어나서 엄마의 행복한 얼굴을 처음 본다고. 정말 행복했다. 30년을 기다려온 사랑의 결실이었다.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호사다마(好事多魔)일까. 2019년 1월 3일 남편이 큰 사고를 당했다. 결혼식을 올린 지 2개월 만에 닥친 불행이었다. 공사장에서 쇳덩어리가 남편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생사의 기로에 놓였다. 제발 살아만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남편이 불쌍했다. 한국에 와서 모진 고생을 했다. 처음에는 건설현장에서 일했다. 일용직이었다. 사고로 왼쪽 손가락 4개가 잘려 나갔다. 그래도 티 안내고 열심히 일했다. 회사는 남편의 능력을 인정했다. 관리직으로 근무시켰다. 정식직원 발령을 냈다. 성실한 남편이 병상에 있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노 씨는 남편간호에 온 힘을 쏟았다. 2년 8개월 동안 병원에서 밤을 지새웠다. 남편은 2021년 8월 퇴원했다. 퇴원은 했어도 옛날의 모습은 아니다. 말이 어눌해졌다. 행동도 부자연스럽다. 지금도 1주일에 3번은 물리치료를 받는다. 퇴원 후 병간호에 더 힘들어 한다.

▲ 귀화 조선인 노해옥 씨와 남편 남순철 씨 <사진=노해옥 씨>

노 씨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앞으론 남편이 정상적 사회생활은 못할 겁니다. 사고 이후 남편이 바뀌었어요. 화도 많이 내고 말도 제대로 표현을 못합니다. 남편이 소리 지르고 할 때면 이혼하고 딸과 함께 나가 살까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잖아요. 

 

전 부인에게 상처 받은 사람인데. 두 번 다시 부인에게 배신 당한 아픔을 주면 안 되잖아요. 제가 끝까지 지켜 줘야죠. 모든 게 제 운명이라 생각합니다. 소원이 있다면 남편이 지금보다 나빠지지 않았으면 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남편을 더욱 보살펴야죠.” (노해옥)

노 씨는 자신의 어려움 속에도 봉사활동을 하며 이웃돕기에 나서고 있다. 다문화센터 봉사 프로그램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반찬을 만들어 독거노인을 방문하고 있다. 결혼이주민에게 중국요리 강습을 하고 있다.

노 씨는 일주일에 3일 간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손님에게 웃는 얼굴로 기쁨을 주고 있다.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는 속마음이다.

희망을 버리지 않는 모습이 숭고하게 느껴진다.

 

토요경제 / 김병윤 대기자 bykim716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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