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9일은 한글날이다. 1990년에 ‘10월은 쉬는 날이 너무 많다’는 어이없는 이유로 공휴일에서 빠졌다가 2013년부터 다시 ‘빨간날’이 됐고, 올해부터는 대체공휴일 제도로 인해 토요일임에도 이어지는 월요일 휴무로 연휴를 만들어낸 소중한 날이다.
매년 한글날이 돌아올 때마다 여러 언론매체들은 매너리즘에 빠진 듯 비슷비슷한 기사를 새삼스럽게 내보낸다. 바르고 고운말을 강조하고, 외래어와 외계어, 외국어의 범람을 개탄하고 뭐 그런 내용들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맞춤법에 천착할 수밖에 없는 위치인 기자 혹은 뉴스 편집자라는 직업을 갖고 오랜 기간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기성세대가 맞춤법과 표준어를 강요하는 것에 매우 회의적인 시선을 갖고 있다.
올드미디어로 분류되는 ‘꼰대언론’들은 문법과 맞춤법 그리고 표준어를 제대로 지키지 않고 외래어, 외국어 사용을 남발하는 세태를 개탄해왔지만 사실 그런 것들은 불변의 교리가 아니라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끼리의 임시적 합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금 우리가 ‘표준어’로 인식하는 어문규칙에 맞게 쓴 글은 불과 50년 전 사람에게 ‘무슨 이런 엉터리 맞춤법이 다 있냐’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50년 전 신문을 읽는 당신이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과 똑같은 이유에서다.
그리고 아마도 똑같은 문장의 글이 50년 뒤 사람들에게는 99% 이상의 확률로 ‘고리타분한 할배들이나 쓰는 옛날 문체 옛날 말투’로 취급 받을 것이다.
외계어의 경우는 어떨까.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의 위대함’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있는데, 개인적으로 특히 주목하는 부분은 오자·탈자가 많이 섞여 있어도 전체 문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비교적 독자가 이해하기 쉽다는 점이다.
예전에 SNS에서 외국인들이 구글 자동번역 등의 번역기를 사용해서 한국어 기사는 물론 댓글까지 모니터링한다는 소식에 덧붙여서, 자동번역기가 절대 해독하지 못할 것 같은 외계어 혹은 억지 오타 포스팅이 돌아다닌 적이 있다.
그런 포스팅을 접해본 사람들은 대부분 공통적으로 느꼈겠지만, 한국어를 제대로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괴상망측하게 쓰여진 문자가 그 내용을 이해하는데 ‘거의’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는다.
이는 한글이 가진 특성 중에 표음문자이면서 표의문자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가능한 현상이 아닐까 추측한다.
같은 맥락에서, 어린 세대들이 한글을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해서 장난치고 노는 현상에 대해 여러 우려의 목소리가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런 현상을 매우 긍정적인 시선으로 보고있다.
나를 포함한 어른들(기성세대) 입장에선 애들이 한국어 같이 보이지 않는 이해 못할 비밀언어를 만들어서 쓰는 게 보기에 좋지 않을 수 있고, 더 나아가 그 애들의 장래가 걱정될 수도 있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그런 어른들에게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서구권에서는 알파벳의 순서를 뒤바꿔서 다른 단어를 만들어내는 애너그램(anagram, 어구전철) 같은 류의 다양한 말장난 놀이가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데, 이런 말장난 놀이들은 지능개발에도 좋은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이렇게 언어를 씹고 뜯고 주무르고 놀면서 언어조작능력을 훈련시키는 것은 문해력을 키우는 것과 함께 부수적 효과로 다른 분야의 학습능력을 키워줄 수 있다고 본다.
더더군다나, 어른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사회생활 및 진로 관련 활동하는데 노는 언어와 사회적 규범에 맞는 언어를 구별해서 사용하지 못할 아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믿고 있기도 하다.
외계어나 문법이나 맞춤법에 맞지 않는 표현 혹은 외래어 사용 증가, 외국어 표현 남발을 보면서 “세종대왕님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시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꽤 있지만 세종대왕께서는 결단코 그런 일을 가지고 화를 내거나 답답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럴 분이 아니라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몇몇 드라마에서 새롭게 묘사한 면모를 참조하지 않더라도, 재임기간 일반 백성들을 위해 펼쳤던 정책들만 살펴봐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부분이고, ‘훈민정음 서문만 봐도 애민의식이 잘 느껴지지 않느냐’고 반문하게 된다.
그런 세종대왕이 만약 문자와 언어 생활과 관련해서 벌떡 일어난다면, 그것은 외계어, 외래어, 문법·맞춤법 오류 같은 문제가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일 것이다.
잠시 빙의되어본다면….
“어리석은 백성들이 자기 뜻을 잘 표현해서 서로 오해하거나 억울한 일 없게 살기를 바랐는데, 사람들이 멀쩡하게 글을 읽어도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니 거참…. 내가 헛일을 한 것인가. 끌끌”
OECD의 2012년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문해력은 19~29세 연령대에서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수준(문해력 수준이 낮은 사람 비율이 적음)이지만, 30~54세 연령대에서는 OECD 평균 정도까지 문해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9년 전 조사니까 지금 기준으로 40대 이상이 문제라는 소리다.
+ 사족 같은 이야기 : 언어, 문자 그리고 한글
‘한글과 한국어는 다른 개념이다’라는 명제는 개인적으로 오래전부터 많이 생각했던 이슈이다. 한글에 대한 자부심이 한국어를 중심에 둔 파시즘으로 이어지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한글은 세계에서 유일한 ‘발명자와 발명시기가 밝혀진 문자체계’이다.
아직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의 우리 선조들은 ‘이두’를 사용했다고 한다. 한문으로만 되어있었을 이두와 한자 문장의 근본적 차이는 어순이다.
삼국시대부터 19세기 말까지 사용했다는 이두는 한국어식 어순으로 발음을 빌려온 한자 단어를 배열하고 명사 뒤에 조사를 사용하는 형식이라고 한다.
반면 정규 한자 문장은 영어처럼 ‘주-술-목’으로 이루어진다.
어순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한자로 된 ‘경서’를 읽는 것은 그냥 어려운 문자로 된 책으로 공부하는 수준을 넘어 ‘외국어 공부’라는 성격도 갖고 있다.
관련해서 언어와 문자 그리고 인식(생각)의 관계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해보자.
‘생각’은 ‘언어’라는 도구를 사용해서 이뤄지기 때문에 자기가 구사하는 언어체계에 존재하지 않는 개념에 대해서는 생각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예를 들어, 일반인들이 인식하고 구별할 수 있는 색깔이 10여개에서 많아야 스무개 남짓이라면, 디자이너들이 인식하고 사용하는 색깔은 그 개수에서 최소 수십 배의 차이가 난다.
어떤 존재나 개념을 규정하는 ‘단어’가 발명되기 전까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던 어떤 심리상태나 사회적 현상이 단어의 등장만으로 세상을 가득 매우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많다.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던 존재가 그 이름을 불러주는 순간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의 시는 이런 현상을 압축적으로 설명한다.
‘언어’는 인식을 가두는 감옥이면서 동시에 인식을 키워주는 터전인 셈이다.
그리고 언어가 인식(생각)의 감옥이자 터전이라면, 문자는 언어의 현신(아바타)이다.
언어는 문자가 발명되기 전부터 존재했지만 문자의 발명은 언어로 구상화된 인식을 저장하고 보존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한국어를 한국어 자체로 표현할 수 있는 한글의 탄생은 “한국어의 재탄생”이라는 성격을 일부 내포하고 있다는 말이다.
토요경제 / 김경탁 기자 kkt@sateconom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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