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용의 고전읽기] 우방을 배신한 나라의 종말

문화·라이프 / 정해용 / 2014-03-10 10:07:00
48. 진(晉) 헌공과 백리해

輔車相依 脣亡齒寒 보거상의 순망치한
수레바퀴와 살은 서로 의지한다. 입술이 없어지면 이도 시리다. (춘추 좌씨전)
서로 돕고 살던 우나라와 괵나라의 관계를 비유한 말.
진(晉)나라가 우의 길을 빌려 괵을 친 후 돌아오면서 우나라까지 정복해버림


진(晉)나라에 새로운 지배세력이 들어서면서 그에 대한 논공행상이 이루어졌지만, 아직 보상과 문책이 다 끝난 건 아니었다. 진 헌공은 곡옥시절 본국을 도와서 곡옥을 힘들게 한 괵(虢)나라에 원한을 갖고 있었다. 재위 22년에 괵을 치기로 했다. 괵으로 진군하기 위해서는 그 사이에 있는 우(虞)나라를 지나야 했다. 헌공이 우나라에 길을 빌려달라고 했다.


그때 우나라의 책사(策士)로는 궁지기와 백리해(百里奚)가 있었다. 대부 궁지기(宮之奇)가 주군에게 간했다. “진나라에 길을 빌려주었다가는 장차 우리나라도 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공은 태평했다. “진나라 군주와 나는 성씨가 같은 집안 사이요. 우리를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오.” 궁지기가 다시 말했다. “같은 집안이라고 해서 안전하다면 같은 형제끼리 왕위를 다투어 죽고 죽이는 일이 어찌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괵나라만 해도 모두 과거 주 문왕의 경사였던 왕계의 자손들입니다. 그들의 공훈은 조정에 기록되어 있고 맹약의 증서들도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문왕의 후손인 진나라가 지금 괵을 멸망시키려고 우리 땅을 지나가겠다는 게 아닙니까. 그보다 관계가 먼 우나라가 어찌 무사할 수 있겠습니까. 또 옛말에 수레바퀴와 덧방나무는 서로 의지한다(輔車相依) 하였고,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脣亡齒寒) 하였습니다. 우나라와 괵나라는 서로 이웃해 있으면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서로를 도우며 살아왔는데, 이제 괵이 멸망하고 나면 그 다음 우리가 공격을 받을 때 도와줄 나라가 없게 될 것입니다. 반드시 거절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우공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우나라가 공격받을 이유가 없다는 논리를 폈지만, 사실은 진나라로부터 두둑한 선물을 미리 받은 터여서 마음이 이미 기울어 있었던 것이다. 우공이 진나라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자 궁지기는 가솔을 거느리고 우나라를 떠나버렸다.


곧 진나라 군대가 우나라 땅을 거쳐 괵으로 진군했다. 괵은 쉽게 무너졌다. 진나라는 돌아오는 길에 우나라를 갑자기 기습하여 또한 멸망시켰다. 우와 괵이 한꺼번에 진나라 땅이 되었다. 진 헌공이 우나라에서 끌고 온 포로들 가운데 백리해가 있었다. 백리해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소문나 있었지만 헌공은 그를 가볍게 보았다. 어차피 지략이 모자라서 망한 나라의 대부였으니 지혜가 있다한들 얼마나 하겠느냐 여겼던 것 같다.


그때 헌공이 죽은 신생과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큰딸을 진(秦)나라 목공에게 시집보내게 되었는데, 그 혼인 행렬에 백리해를 잉신으로 삼아 딸려 보냈다. 진나라로 가던 길에 백리해는 행렬을 벗어나 동쪽으로 달아나버렸다. 사나이로 태어나 큰 뜻을 품고 출세의 길을 찾았지만 평생 주인을 찾아 헤맨 끝에 늘그막에 겨우 시집가는 공녀의 길잡이나 하는 신세가 스스로 한심했던 것일까.

이때 나이는 벌써 70을 바라보았다. 어지간하면 한 인간으로서의 삶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 때다. 그 스스로도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는 곧 해안을 끼고 있는 초나라 경계로 들어섰는데, 거기서 자신의 학식이나 경력을 자랑하지 않고 다만 소를 잘 키운다는 경험만 내세워 목부 일자리를 얻었다. 오래전부터 그는 가축을 잘 돌보는 기술이 있었다. 덕분에 바닷가에서 말을 돌보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한적한 곳에 숨어 조용한 노후를 보내기엔 안성맞춤인 자리였다.


그러나 거기서 끝났다면 백리해라는 이름이 역사서에 남았을 리 없다. 운명은 바닷가 말 목장에 숨어있는 그를 기어코 찾아내 당대 정치의 한복판으로 끌고 간다. 나중에 공자나 맹자가 여러 차례 언급할 정도로 유명해진다. 무언가 준비된 인간은 마지막 순간까지 그 앞일을 장담할 수 없는 것이랄까. 그 사연은 다음 회에 전하기로 한다.


이야기 PLUS
송나라 양공이 전쟁에서 군자의 도리를 따지다가 초나라 군에게 대패하여 웃음꺼리가 된 전쟁 이후 제후국들 사이의 전쟁은 의미가 달라졌다. 이전까지의 전쟁에서는 어느 나라가 다른 나라를 이겼다 해도 성이나 몇 개 빼앗고 말지 나라를 통째 집어삼키는 일은 없었다. 중원의 나라들이 사실상 왕국 아닌 제후국이어서, 중국 전체를 지배하는 주(周)나라 천자 아래서는 모두 평등한 제후라는 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땅은 모두 천자로부터 하사받은 봉지(封地)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원칙적으로, 천자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제 마음대로 자기 땅을 넓힐 수 없고, 더더구나 다른 제후를 죽이거나 그의 땅을 빼앗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천자의 힘이 유명무실해지고 제후들의 권력이 커지면서 세태는 바뀌었다. 제 환공이니 진 목공이니 하는 패자들이 등장하면서 약소국은 강대국을 섬기다가 흡수 합병되기 시작했고, 우나 괵의 예에서 보듯 강대국에 의한 정복전쟁도 시작되었다.


100개 넘는 제후국들의 수가 급속히 줄어든다. 이전까지가 춘추(春秋)시대고, 이제부터를 전국(戰國)시대라 부른다. 최후에는 전국칠웅이라 부르는 일곱 나라만 남게 되고 마침내 진(秦)에 의한 전국통일이 이루어진다. 기원전 770년부터 476년까지 300여년이 춘추시대, 이후 250년 정도가 전국시대에 해당한다. 시대가 바뀌는 그 시기에 공자(孔子)가 있었다.


“괵이 망하더라도 우리는 공격받지 않을 것이오.”
우공은 진나라로부터 두둑한 뇌물을 받은 터여서 마음이 이미 기울어 있었다.
“이 나라는 올 겨울에 망할 것이다.”
궁지기는 가솔을 이끌고 우나라를 떠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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