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범 감독 농구판 뒤흔든 ‘그림자 리더십’

문화·라이프 / 김경제 / 2012-04-20 11:41:43
스스로 ‘초짜 감독’…항상 배우는 자세로 임해
▲ 지난 6일 강원 원주 치악실내체육관에서 열린 2011-2012 KB국민카드 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 6차전 원주 동부와 안양 KGC의 경기에서 KGC 이상범 감독이 작전을 지시하고 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들러리 정도로 여겨졌던 이상범(43) 감독과 안양 KGC인삼공사(이하 인삼공사)가 2011~2012시즌 남자 프로농구판을 뒤흔들었다. 인삼공사는 지난 6일 막을 내린 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에서 정규리그 우승팀이자 유력한 우승후보였던 원주동부를 꺾고 출범 15년 만에 처음으로 챔피언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전신 SBS, KT&G에서 선수와 코치를 지냈던 이 감독은 지휘봉을 잡은 지 3년 만에 정상에 오르며 ‘안양농구 전성시대’를 알렸다. 종료 휘슬이 울리는 순간, 뜨거운 눈물을 쏟아낸 이 감독. 그는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 없던 그저 그런 감독이었다. 아니 그래 보였다. 그리고 ‘그림자 리더십’을 완성했다.


◇주머니에는 항상 사표
2년이라는 시간. 누군가에게는 매우 길고, 누군가에게는 매우 짧은 시간이다. 이상범 감독에게 지난 2년은 정말 긴 시간이었고 고난과 역경이 이어지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 희망은 있었지만 장담할 수 없었고 기회조차 날릴지 모른다는 위기감도 크게 느꼈다.


인삼공사는 리빌딩(팀 재건 작업)을 위해 지난 2시즌을 사실상 날렸다. 밑바닥에서 헤맸다. 이 감독은 항상 사표를 들고 다니며 다른(?) 생각도 많이 했다. 2008~2009시즌을 마치고 팀의 간판이던 포인트가드 주희정을 SK로 떠나보내며 신인왕 출신 김태술을 영입했다. 홈 팬들의 거센 반발이 있었지만 이 감독은 맨 앞에서 욕을 다 먹었다. 리빌딩의 시작이었다.


이어 김태술을 비롯해 양희종, 김일두를 모두 군대에 보내면서 ‘지금’을 버렸다. 무모함에 가까운 도박이었다. 2011년 신인드래프트에서 최대어로 꼽히던 오세근을 뽑을 수 있다는 가정하에 벌인 일이다. 앞서 2010년 드래프트에서 박찬희, 이정현을 뽑으며 전력을 채웠지만 오세근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따지고 보면 2010년 드래프트 역시 성공적인 리빌딩의 한 과정이 된 셈이다.


그리고 올 시즌을 앞두고 군에서 돌아온 김태술, 양희종에 2년차 가드 박찬희, 이정현 그리고 신인 오세근으로 완벽한 국가대표 라인업을 완성했다. 이 감독은 2년 동안 주로 숙소 감독실에서 소주잔을 기울였다. 죄인처럼 안양 팬들의 따가운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인삼공사는 웃었다. 이 감독이 그림자로 지낸 보상이다.


◇“모르는 것을 묻는 것도 용기”
“오늘도 하나 배웠습니다.” 이상범 감독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다. 무모하다 싶을 만큼 짧고 굵은 리빌딩 과정을 거치면서 참 많이 진 탓일까. 지난 두 시즌 성적은 8위와 9위. 이 감독은 항상 자신감이 없었다. 말도 많이 하지 않았다. 전술 얘기를 꺼낸 적도, 실수한 선수를 호되게 꾸짖는 모습도 보기 힘들었다. 유약하다고 느껴질 만큼 ‘허허실실’이었다.


이번 챔피언결정전을 앞두고 인삼공사의 불안요소로 선수들의 경험 부족을 꼽았다. 그러나 카리스마 없는 감독 역시 약점으로 꼽은 이들이 많다. 그러나 달랐다. 이 감독은 챔피언결정전에서 숨겨둔 무언가를 모두 꺼냈다. 부산 KT와의 4강 플레이오프까지만 해도 “전창진 감독님께 한 수 배웠다”며 겸손을 떨던 모습은 서서히 사라졌다. 믿는 구석이 있었다.


이 감독은 스스로를 ‘초짜 감독’이라고 불렀다. 항상 배우는 자세로 임했다. 챔피언결정전이 열리는 동안에도 여전히 수업 중이었다. 이 감독은 시리즈 중에 전창진 KT 감독, 유재학 모비스 감독, 김동광 삼성 감독, 방열 건동대 총장, 최인선, 김인건 등 지도자 선배와 원로들에게 많은 자문을 구했다. 잘 모르는 것은 거침없이 물었다. 자칫 감독으로서 역량이 부족해 보인다는 지적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용기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았다.


이 감독은 “모르는 것을 묻지 않고 아는 척을 하는 것이 더 잘못된 것이다. 모르는 것은 꼭 확실히 물어야 하고 감독이라고 해서 피할 필요는 없다. 묻는 것도 용기”라고 말했다. “적장한테도 물어볼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 정도로 물어보고 공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곰인 척 한 여우, ‘동부산성’ 넘어
누구나 동부의 우세를 점쳤다. 전문가 중 일부는 동부의 일방적인 4승을 예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인삼공사의 전술은 완벽했다. 40분을 쉬지 않고 압박하는 ‘밀어붙이는 농구’를 구사해 동부의 체력을 고갈시켰고 동부가 가장 잘 쓰는 3-2 지역방어를 역으로 활용해 강동희 감독을 당황하게 했다. 이를 바탕으로 경기 흐름을 빠르고 정신없게 만들면서 빈틈없던 ‘동부산성’을 무너뜨렸다.


이 감독은 1차전에서 진 뒤 2차전에서 비장의 3-2 드롭존 수비를 들고 나와 동부를 잡았다. 3차전에서는 동부가 드롭존 수비에 대한 해법을 들고 나오자 맨투맨 수비로 바꿔 흐름을 팽팽하게 가져갔다. 1점차로 인삼공사가 졌지만 강동희 동부 감독은 “드롭존에 대비한 걸 의식했는지 거의 쓰지 않더라. 준비한 걸 쓰지도 못했다”고 고개를 저었다. 준비한 무기를 적재적소에 응용할 줄도 알았던 이 감독이다. 더 무서운 것은 발톱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 3-2 지역방어는 2주 동안 동부를 타깃으로 갈고 닦은 전술이다.


그러나 이 감독은 힘겨운 KT와의 4강 플레이오프에서 이 전술을 사용하지 않았다. 챔피언결정전을 앞두고 굳이 자신들의 무기를 보여줄 이유가 없었다. 이미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평소 이 감독의 모습과 비교하면 어울리지 않는다. 탁월하면서 배짱 넘친 선택이었다.


이 감독은 우승 후에 다시 곰 같은 모습으로 돌아갔다. 지난 9일 프로농구 시상식장에 나타난 이 감독은 행사장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지 못해 길 잃은 아이처럼 혼자 이곳저곳을 헤매고 다녔다. 와중에 환한 미소로 팬들에게 인사하는 것은 빼놓지 않았다. 일부러 그런 것 같다. 속으로 ‘제가 우승팀 감독, 이상범입니다’라고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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