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손 이운재, 이제부터 '2막'

문화·라이프 / 전현진 / 2012-12-24 11:24:29
지도자로 다시 그라운드에 돌아갈 것

2002년 6월 22일 광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한국과 스페인의 월드컵 8강전 승부차기. 한국의 수문장 이운재(39)는 스페인의 네 번째 키커 호아킨 산체스의 슈팅을 막아낸 뒤 두 손을 굳게 맞잡고 승리를 확신한 듯 미소 지었다. 그의 선방에 힘입어 한국은 스페인을 승부차기에서 5-3으로 꺾고 월드컵 4강 진출 신화를 이뤄냈다.


그는 2002 한일 월드컵의 ‘영웅’, ‘거미손’, ‘태극 수문장’으로 불렸다. 그랬던 그가 20년간(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상비군 발탁 기준) 선수로서 함께 해온 초록빛 그라운드를 지난 17일 떠났다.


이운재는 지난 11일 에이전시 모로스포츠를 통해 “선수생활 지속과 은퇴 사이에서 고민했으나 팬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떠나야 한다고 판단했다”며 은퇴의 뜻을 전했고 지난 17일 ‘공식 은퇴 기자회견’을 열고 그라운드를 떠나는 소감을 밝혔다.


그는 “은퇴를 결정하는 시점에서 아내에게 ‘이제 내려놓자. 그만하자’고 말했다. 아내가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했다”며 “나 역시 선수였을 때 많은 것을 해야 했었는데 그렇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좋은 모습만 보여줬어야 했는데 나쁜 모습도 보여줬기에 아내에게 더욱 미안했다”고 밝혔다.


이어 “처음 은퇴 결심을 했을 때 일주일 정도 계속 눈물이 흘럿다. 그래서 은퇴식에서는 울지 말자고 결심했다”며 “울면 은퇴에 대한 결정이 더 아쉬워질 것 같았다. 오늘 집에 가면 아내를 붙들고 또 울지 모른다”고 덧붙였다.


은퇴 이유에 대해, 이운재는 “지난 8월 정해성 전 전남 감독님이 사임을 하고 난 뒤부터 은퇴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최종 결정은 며칠 전에 내렸다”며 “올해 전남이 강등 위기에 처해 있었다. 선수로서의 마지막 목표를 팀의 강등 탈출에 두고 최선을 다했고 그 일들을 다 끝내 놓은 뒤 은퇴를 결정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나는 운동선수다. 은퇴를 결정했지만 운동에 대한 욕심이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라며 “다만 지금 여기서 떠나는 것이 팬들에게 더 아름답게 비춰질 수 있다고 판단했기에 힘든 결정을 내렸다”고 은퇴에 대한 아쉬운 마음을 솔직히 드러냈다.


지난 1996년 수원 삼성의 창단 멤버였던 이운재는 2010년까지 수원에서 뛰며 ‘미스터 블루’로 불렸다. 2008년에는 수원의 우승과 함께 골키퍼로는 최초로 최우수선수(MVP)에 선정됐다.


◇ 이운재, 화려했던 성적 뒤로하고…
한 때 이운재는 2007년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아시안컵 기간에 술을 마신 것이 알려져 1년간 국가대표 자격을 박탈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징계가 풀린 뒤 2010 남아공월드컵 엔트리에 선발되는 등 여전한 노련함으로 기량을 과시했다. 그는 1996년부터 수원 삼성에서 뛰었지만 2010년 시즌 종료 후 수원과 재계약에 난항을 겪으면서 은퇴 위기가 찾아왔었다.


그러나 이듬해 2011년에 한일 월드컵 당시 코치였던 정해성 감독이 사령탑으로 있는 전남으로 이적했다. 그러나 올 시즌 중반 전남이 성적 부진에 빠져 정해성 감독이 중도 사퇴하면서 이운재의 입지에도 큰 변화가 밀려왔다.


새로 지휘봉을 잡은 하석주 감독은 체중 감량을 이유로 이운재를 벤치 멤버로 내몰기도 했다. 전남이 세대교체 작업을 추진하면서 이운재는 은퇴를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다. 결국 시즌 종료 뒤 전남은 지난 7일 이운재에게 재계약 불가 방침을 통보했다.


최근 부진을 겪은 이운재지만 국내 골키퍼 역사에 ‘유일무이’한 기록들을 많이 세웠다. 골키퍼 최초 K리그 최우수선수(MVP) 수상(2008년), 골키퍼 최초 센추리 클럽 가입(A매치 132경기 출전), 2002한일월드컵 4위 등 그는 골키퍼로서 누릴 수 있는 수많은 영광들을 맛봤다.


이운재는 1994년 미국 월드컵을 앞두고 태극마크를 단 뒤 17년 동안 132경기의 국가대표팀 간 경기(A매치)에 나섰다. 이운재의 A매치 기록은 132경기 출전 114실점(경기당 0.86실점)이다. 한국 선수 중 홍명보(43) 전 올림픽 대표팀 감독(136경기)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이 태극마크를 달았으며, 골키퍼로서는 최다 출전이다.


◇ 이운재, “축구 그 자체가 행복이었다”
축구선수로서 가장 높은 위치에 올라섰지만 이운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특별한 상이나 기록이 아니었다. 그저 ‘축구’ 그 자체가 행복이었다.


이운재는 “축구를 하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따로 꼽을 수 없다. 내가 축구를 했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축구를 했기에 많은 분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결 같은 축구 사랑을 나타냈다.


대표팀 경기를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에 대해 물어보자 이윤재는 역시 2002한일월드컵을 꼽았다. 그는 “대표 생활을 오래 했고 월드컵이라는 큰 무대도 4번 정도 밟아 봤지만 모든 성공을 맛보게 한 것은 역시 2002한일월드컵이었다”며 “당시에 준비하면서도 내게 기회가 올 것이라는 생각은 못했다. 단 이번에 기회를 못 잡으면 대표팀을 떠나자고 생각하며 열심히 도전했다. 그 과정 속에서 성장할 수 있었고 좋은 결과를 얻었기에 대표 선수로서의 성공을 맛보기 시작한 것 같다”고 전했다.


기자들이 축구 인생에서 가장 아쉬웠던 때가 언제냐고 물어보자 그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며 “내 축구 인생을 정리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아픔과 아쉬움이 더 많이 남는다. 내 축구의 시작과 끝이 가장 좋았고 슬픈 것은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운재의 향후 거취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도자’를 통해 제 2의 축구인생을 시작하겠다는 꿈만큼은 확고했다.


이운재는 “최근 수원삼성 코치에 대한 얘기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아직 수원과 접촉하거나 얘기를 나눈 적은 없다. 수원의 코치가 되는 것은 모든 축구인들의 로망”이라며 “오늘 은퇴식이 끝나고 나면 지도자의 길을 걷든 공부를 더 하든 명확한 결정을 내리게 될 것이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나는 그동안 축구를 해왔고 축구선수로 사랑을 받아왔기 때문에 반드시 운동장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다. 약속할 수 있다”고 새로운 이운재의 모습을 기대케 했다.


마지막으로 이윤재는 후배들에게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높은 곳을 위해 올라가는 것보다는 정상을 지키는 것이 더 어렵다”며 “올라 갈 때는 목표가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다. 하지만 정상에서 1인자가 되면 주변에서 흔든다. 밑에서 다른 선수들이 정상을 보며 올라오기 때문에 힘들다. 선수 생활은 어렵지만 열심히 노력하다보면 꼭 좋은 기회가 온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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