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과 파괴, 두 가지 꿈이 대립하다

문화·라이프 / 전성운 / 2012-12-06 14:32:03
‘위험한 철학자’ 지젝의 혁명을 꿰뚫는 역설

“단지 내가 걱정하는 것은 우리가 집으로 돌아간 후 일 년에 한번쯤 만나 맥주를 마시면서 향수에 젖어 이 날을 회상하는 것이다. ‘그때 우리 정말 좋았지.’ 그렇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하자. 사람들은 종종 무언가를 갈망하지만 진정으로 원하지는 않는다. 갈망하는 것을 진정으로 추구하길 두려워하지 마라.” - 월가점령시위장을 찾은 지젝의 연설 중에서


자본주의의 종말, 상상하기 어려운 주제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시장의 붕괴를 막기 위한 각국 정부의 개입은 결국 시장의 부채를 공공 부채로 이전하는 ‘부자들의 사회주의’라는 현상으로 이어졌을 뿐이다.


월가점령시위부터 아랍의 봄까지 세계 곳곳에서 불만을 표출하는 시위가 일어났지만 근본적인 사회 변화의 시도로 바꾸기 위한 기획은 부재하다.


이에 대해 ‘현존하는 가장 위험한 철학자’로 불리는 슬로베니아 출신의 세계적인 석학 슬라보예 지젝은 “잠시 행동을 멈추고 현 체제의 본질과 유지 원리를 곰곰이 생각하고 세계의 근본적인 변화를 위해 냉철하게 고민해야 할 시기가 왔다”고 말한다.


<멈춰라, 생각하라>에서 지젝은 은 헤겔의 철학과 라캉의 정신분석학, 그리고 마르크스의 사상적 토대와 영화, 미드, 뮤지컬 등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2011년 월가점령시위부터 아랍의 봄을 통해 번져 나온 ‘해방의 꿈’과, 총기 난사로 7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노르웨이의 브레이비크 사건과 같은 ‘파괴의 꿈’을 면밀히 분석한다.


이 책의 원제 ‘위험한 꿈을 꾸는 해’라는 말처럼 지젝은 금융위기로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는 한편, 정치적 압제에서 벗어나려는 투쟁이 세계 곳곳에서 전개되었던 2011년의 희망과 절망, 기회와 위협을 다각도로 조명, 현재 지배이데올로기의 윤곽을 통해 자본주의의 기능을 강화시키지 않고 맞서 싸울 방법을 찾는 과제를 풀어나간다.


지젝은 ‘민주주의’라는 틀에 갇히지 말고 그보다 더 개방적인 사유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현재와 같은 다당제 형태의 대의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병폐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다시 발명되어야 한다.


2011년은 급진적인 해방정치가 전 세계적으로 부활하며 위험한 꿈을 꾼 한 해였지만, 그 각성이 얼마나 취약하고 모순적인지 입증하는 증거들이 매일같이 날아들고 있다. 아랍의 봄에서 느낀 열정은 타협과 종교적 근본주의의 수렁에 빠져버렸고, 월가점령시위는 극도로 추진력을 잃어버렸다.


2011년 8월 런던을 들끓게 만든 영국 폭동 역시 진정한 자기주장이 없었다. 그것은 무력한 분노이자 무력의 탈을 쓴 절망이었고, 승리의 카니발의 가면을 쓴 질투였다. 체제에 대한 저항은 오히려 체제를 강화시키고 자본주의 이후를 상상하기란 더욱 어려워졌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지젝은 세계를 휩쓴 해방의 흥분과 감동에서 벗어나 잠시 행동을 멈추자고 말한다. 그리고 다가올 새로운 것을 위한 공간을 열어놓고 미래를 위한 기획을 고민해봐야 할 시기라고 역설한다. <멈춰라, 생각하라>, 슬라보예 지젝 저, 주성우 역, 이현우 감수, 1만4000원, 와이즈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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