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왜곡시키는 현재에 나는 저항한다”

문화·라이프 / 전성운 / 2012-11-29 12:43:09
세상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어느 사상가의 기록

‘자살 작가’, ‘불가지론자’, ‘세상에 대한 신뢰가 없는 사상가’, ‘잃어버린 세대’라는 수식어가 말해 주듯 아우슈비츠, 부헨발트, 베르겐벨젠 수용소를 전전하면서 파시즘 야만이 불러온 유례없는 인류사의 파국을 직접 체험한 장 아메리는 말한다. “고문, 그것은 강간이다”


1943년 망명지였던 벨기에에서 나치의 지배에 저항 활동을 하다가 체포된 그는, 브뤼셀 주재 게슈타포 본부가 관할하는 ‘생질 수용소’에 수감되지만, 같은 날 브렌동크 요새로 옮겨져 친위대(SS)에게 심한 고문을 당한다. 이 당시 겪은 생생한 고문의 경험은 “고문을 경험한 자에게 이 세상은 더 이상 편하지 않다”라는 인식에 이르게 한다.


자아가 세계와 만나는 가장 일차적인 경계가 바로 ‘몸의 경계’인데, 누군가가 우리를 구타하고 고문한다면 그 사람은 타인에게 자신의 육체성을 강요하는 것으로, 타인의 신체 혹은 피부를 침범함으로써 상대방을 파멸시키는 것이다.


아메리는 그것을 ‘두 당사자 중 한 사람의 동의가 없는 성행위’, 다시 말해 ‘강간’이라 규정했다. 이를 경험한 자는 그 어떤 인간적인 의사소통을 통해서도 상쇄될 수 없는 세계에서의 낯설음을 경험하게 된다. 고문에 시달렸던 사람을 더 이상 이 세상을 고향처럼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시 망명을 갔거나 살아남은 유대인들 가운데는 자신들의 편에서 독일과의 화해를 추구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아메리는 전후 유대인들의 이 같은 화해의 노력에 동참하지 않았다.


그가 이런 관대한 움직임에 대해 신뢰나 동조의 눈길을 보내지 않는 것은 이들이 아우슈비츠를 직접 경험한 피해자들의 고통을 공감하고 공유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아메리는 에세이 <원한>에서 화해 대신에 원한의 감정과 원한의 표현을 옹호한다.


당시 대부분의 독일인, 나아가 전 세계가 원했던 화해나 용서 대신 그는 “원한과 분노를 지속적으로 간직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역설적 주장을 통해 자신이 받을 비난을 예상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르상티망’이라는 단어를 포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겉보기와 달리 그의 언어는 근본적으로는 ‘계몽의 언어’이다. 계몽의 원칙에 입각한 그의 글쓰기는 지속적으로 ‘스스로에게 질문하기’나 한 치의 가감 없이 사실만을 드러내려는 그의 의도와 관련된다.


모든 허구적인 것을 포기하고 오로지 진실만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 철저히 자신의 체험과 사유에 바탕을 둔 그의 글쓰기는 풍부한 전거와 인용을 포함한, 치밀하고 세부적인 것에까지 파고드는 분석적 언어에 있다. 자신의 처절한 체험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방송과 신문 기고, 책을 통해 끊임없이 불편하지만 적확한 분석을 시도했던 아메리는 종국에는 1978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는 말했다. “어떤 것도 해결되지 않았고, 어떤 갈등도 해소되지 않았으며, 어떤 내면화하기도 단순한 기억이 되지 않았다. 일어났던 것은 일어난 것이다. 그러난 일어났던 것을 단순히 받아들일 수는 없다. 나는 저항한다. 나의 과거에 대해, 역사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역사로 냉동시켜 버리고, 그렇게 해서 화가 치밀 정도로 왜곡시키는 현재에 대해.” <죄와 속죄의 저편>, 장 아메리 저, 안미현 역, 1만6000원,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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