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칼럼] 26억 장 찍었다는 5만원권 …“나는 없다”

김영린

youngkim@sateconomy.co.kr | 2021-05-31 05:40:00

사진=픽사베이


5만 원짜리 돈 발행 잔액이 130조 원을 넘었다는 소식이다. 한국은행이 5만 원짜리 고액권을 발행하기 시작한 게 2009년 6월 23일부터였는데, 올해 4월말 현재 130조7786억 원에 달했다는 것이다. 12년 동안 매년 11조 원, 매달 1조 원 가까이 5만 원짜리 돈을 찍어낸 셈이다.


장수로는 26억1600만 장이라고 했다. 가로 15.4cm인 5만 원짜리 돈 26억 장을 이어 붙이면 지구를 10바퀴 감을 수 있다고 한다. 올해 추계인구 5182만 명을 감안하면 국민 1인당 50장씩 돌아가는 것이라고도 했다. 한마디로 엄청나게 찍어낸 것이다.


국민 1인당 50장이면, 250만 원이다. 단순 계산으로 이제 막 태어난 갓난아기까지 5만 원짜리 돈 250만 원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가 될 수 있다. 4인 가족을 따지면 1000만 원이다.


돌이켜보면, 한국은행은 ‘시기상조’라는 여론에도 불구하고 5만 원짜리 고액권 발행을 강행했다. 그러면서 내세운 게 ‘국민 편리’였다.


1만 원짜리 돈이 발행된 1973년 이후 국민 1인당 소득은 100배 넘게 늘었고, 물가도 13배나 치솟았다고 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1만 원짜리를 ‘고액권’으로 쓰고 있어서 불편하다는 논리였다.


10만 원짜리 자기앞수표를 사용하면 되지만, 그 발행비용이 연간 2800억 원에 달하고 있다고도 했다. 따라서 5만 원짜리 돈을 찍으면 자기앞수표 사용에 따른 낭비도 줄일 수 있다는 주장도 곁들였다.


그러나 서민들은 돈이 없다. 1인당 50장은커녕, 지갑에 기껏 2∼3장 넣고 있을 뿐이다. ‘비상용’이다.


‘쥐꼬리 수입’을 쪼개고 또 쪼개서 써야 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서민들은 은행 이자를 갚고, 집 월세를 물기 위해서 알량한 수입을 조각내고 있다. 아이들 학비 때문에 그 조각난 수입을 또 가르는 게 서민이다. 월급쟁이들은 점심값 몇 천 원도 부담스러워하고 있다.


게다가, 서민들은 어쩌다가 ‘조금 많은 돈’을 지출할 일이 생겨도 고액권으로 지불할 필요도 없다. ‘신용카드’로 긁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은행의 ‘국민 편리’ 논리에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


고액권을 펑펑 쓸 능력이 있는 국민은 제한적이다. ‘정말로’ 편리해진 국민은 아마도 따로 있다. 부피가 작고 운반하기 좋은 고액권 뭉칫돈을 자주 사용할 필요가 있는 국민이다.


언젠가는, ‘마늘밭’에서 쏟아져 나온 무려 110억 원의 5만 원짜리 ‘검은 돈’이 세상을 놀라게 했었다. 이른바 ‘관봉(官封) 5000만 원’을 기억하는 국민이 아직도 적지 않다. 갓 발행된 5만 원짜리가 관봉(띠지)도 풀리지 않은 채 100장씩 묶여 있었다는 돈이다. 검찰이 어떤 대기업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5만 원짜리가 다발로 30억 원이나 들어 있는 사과 상자 4개가 발견된 적도 있었다.


이렇게 많이 숨어 있어서인지, 5만 원짜리 돈은 ‘환수율’이 낮은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풀려나간 돈이 한국은행으로 덜 돌아오는 것이다. 환수율이 50%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풀려나간 5만 원짜리 돈의 절반은 어딘가에 잠겨 있는 셈이다. 돈이 돌지 않으면 더 이상 돈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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