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부·LH 뒷짐에 '장애인만 생고생'
현장취재-장애인 임대아파트의 '불편한 진실'
유지만
redpill83@naver.com | 2013-04-26 21:13:45
[토요경제=유지만 기자] 지난 4월 20일은 ‘제33회’장애인의 날이었다. 이 날로부터 일주일 간 ‘장애인 주간’이기도 하다.
장애인의 날을 맞아 전국 각지에서 장애인 관련 행사들이 많았다. 서울만 해도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하는 자선행사부터, 마라톤·걷기대회 등 여러 행사들이 열렸다. 심지어 커피 200여잔을 무료로 돌린다는 커피숍도 등장했다.
장애인을 위한 행사들은 많았지만, 여전히 장애인의 열악한 현실에 대한 인식은 부족한 상태다. 그 중에서도 장애인의 주거시설에 대한 대책은 장애인 정책의 ‘사각지대’다. 장애인 이동권에 대한 사회적 동의 덕에 많은 변화가 생겨났지만, 장애인의 ‘주거권’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부족하다. 특히 국가에서 제공하는 영구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는 장애인들의 현실은 열악하기만 하다.
◇ “화장실에 ‘L자 바’ 하나도 안 되나”
서울시 강북구 번동 영구임대아파트에 거주하는 김승기(가명, 61세 남, 뇌병변 1급)씨는 지난해 가을 화장실에서 나오던 중 넘어져 오른쪽 발가락 세 개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마치고 나오던 중 손을 헛짚으면서 넘어졌고, 하체를 쓰지 못해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지면서 발가락이 접혀 부러졌다. 결국 김 씨는 부러진 발가락 때문에 불편한 몸을 이끌고 여러 차례 병원을 다녀야 했고, 몇 달 동안 불편한 몸과 발가락의 상처까지 ‘2중고’를 견뎌야만 했다.
화가 난 김 씨는 자비를 들여 집안 곳곳에 손잡이를 설치했다. 김 씨는 “화장실 변기 옆에 ‘L자 바’하나만 있었어도 당시 사고는 나지 않았을 것을…”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L자 바’란 화장실 변기 양 옆에 설치하는 L자 형태의 안전손잡이를 가리킨다.
근처에 사는 또 다른 지체장애인인 조화영(가명, 48세 여)씨도 사정은 마찬가지. 밖에서 휠체어를 타고 이동하기엔 많이 편해졌지만, 막상 집에 들어오면 바깥보다 더한 불편을 느끼게 된다. 그는 “화장실에 가거나 외출 준비할 때 가장 힘들다”고 토로하며 “활동보조인들이 도와주긴 하지만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다. 혼자 있을 땐 불편하고…지지대나 손잡이가 있으면 좋기는 한데 누구한테 해달라고 하기도 미안하고, 어디에 말할지도 모르겠다”고 하소연 했다.
◇ 아파트 현관부터 '난감'
기자는 이들이 거주하는 강북구 번동 영구임대아파트를 직접 방문해 실상을 접해보기로 했다. 취재에는 번동 임대아파트 내 장애인 주거시설 개선을 추진해 온 강북구 구본승 의원이 동행했고, 장애인 거주자인 김승기 씨의 집을 방문하기로 했다.
김 씨는 직접 휠체어를 타고 아파트 현관문에 들어서는 과정부터 보여줬다.
열쇠로 현관 문을 열고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난관이 시작됐다. 방으로 올라가는 턱이 높아 휠체어가 들어갈 수가 없었던 것. 턱의 높이는 어른 발목 정도의 높이였다. 비장애인의 경우 신발을 벗고 편히 올라가면 되지만 장애인의 경우 휠체어가 올라가지 못하면 방 안까지 기어 가야하는 불편함이 따른다. 김 씨의 경우 턱 앞에 휠체어가 올라갈 수 있도록 각목을 계단처럼 쌓아 놨지만, 불편함은 여전하다.
휠체어에서 내려와 집 안을 돌아다니기는 더 어렵다. 스위치의 높이부터 애를 먹인다. 비장애인에 맞는 높이로 설치된 스위치들은 하체를 쓰지 못하는 김씨에겐 곤욕이다. 그는 “혼자 있을 때 화장실를 가면 가끔 깜깜한 상태에서 볼일을 보기도 한다”고 말했다. 손이 닿지 않아 화장실 불을 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생활보조인이 항상 있는 것도 아니고, 가장 기본적인 생활을 하려 할 뿐인데도 이렇게 불편하다”고 토로했다.
스위치도 문제지만, 김 씨가 집 안에서 생활할 때 가장 힘든 일은 화장실 이용이다. 화장실 바닥이 미끄럽고 딱딱해, 자칫 넘어지기라도 하면 크게 다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볼일을 볼 때에도 손잡이가 없으면 변기 위까지 ‘기어 올라가야’한다. 그 때문에 변기 앞에는 화장실에 설치하는 나무 발판을 깔았다. 자칫하다 손이 미끄러지면 그대로 다칠 수 있기 때문이다.
좌식 샤워시설이 없는 것도 문제다. 스위치 문제와 마찬가지로 샤워기가 너무 높이 위치해 있어 앉은 채로 샤워기를 사용하기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욕조에도 손잡이가 없어 비누샤워를 하고 난 뒤에 더 위험했고, 늘 조심하면서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김 씨는 “집 바깥보다 집 안이 더 위험하다”고 잘라 말했다. 장애인 이동권신장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사람들의 인식도 바뀌고 이동시설도 조금씩 개선되고 있지만 주거시설의 문제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 것이다.
◇ 설문조사 결과 68% “장애 반영 전혀 안돼”
번동 임대아파트 거주 장애인들의 불만이 높아지자, 서울특별시 장애인마을공동체사업 ‘중증장애인과 함께하는 번동마을 어깨동무사업단’이 직접 설문조사를 비롯한 실태조사에 나섰다. 설문은 지난 2012년 11월 26일부터 12월 18일까지 강북구 번동 주공 2,3,5단지에 거주하는 지체, 뇌병변, 시각장애인 1~3급 주민 214명을 대상으로 실시됐다. 직접 조사원이 세대를 방문해 대면조사하는 방식을 취했다.
조사결과 임대아파트 내 중증장애인들의 주거시설 개선요구가 매우 큰 것으로 나타났다. 임대아파트 실내 주거시설이 장애를 고려했는지 묻는 질문에는 67.8%(139명)가 ‘전혀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고 답했다. ‘어느 정도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는 답변도 9.76%(20명)에 달해, 반영되지 못한다는 답변이 77%를 넘었다.
현재 거주하면서 실내 주거시설 중 가장 불편한 시설을 골라달라는 질문에는 28.15%(143명)이 ‘화장실 벽면 안전 손잡이 부재’를 꼽았다. 이어서 ‘현관에서 거실로 가는 안내 손잡이가 없어 불편하다’는 답변이 27.56%(140명)로 뒤를 이었다.
주거시설 중 가장 먼저 개선할 시설을 묻는 질문에는 1위로 ‘좌변기 안전손잡이’를 34.76%(65명)가 선택해, 화장실 내에서의 안전시설이 시급한 것으로 조사됐다.
영구임대아파트를 관리하는 관리사무소와 LH등에 대한 불만 섞인 답변들도 나왔다. 관리소나 LH 측으로부터 ‘주거시설 개선공사’ 신청 접수를 받았는지 묻는 질문에는 80.42%(152명)가 ‘없었다’고 답해 관리 업체와 LH 측의 무관심을 엿볼 수 있었다.
◇ 국토부·LH 측 ‘나몰라라’ 떠넘기기 급급
설문조사를 실시한 ‘번동 어깨동무사업단’과 강북구 구본승 의원은 조사 분석 결과를 토대로 LH 측에 주거시설 개선을 요구했다. 구 의원 측은 지난 2월 초 번동 임대아파트 내 장애인 거주시설 개선을 요구하는 민원을 LH측에 접수했다.
돌아온 답변은 구 의원 측을 허탈하게 만들었다. 구체적인 답변은 전혀 없었고, “설문조사 결과를 잘 받았고, 이를 토대로 영구임대아파트 내 중증장애인 편의시설 개선 계획에 대해 검토해보겠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황당한 마음에 구 의원은 LH측 관계자에게 전화로 항의했다. 구 의원에 따르면 LH 관계자는 “기존에 건립해 입주한 영구임대아파트의 중증장애인 주거 편의시설 관련 예산이 전혀 없어 올해 개선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내년에 개선계획을 수립하도록 하겠다”는 원론적인 입장만 되풀이했다.
LH측과의 대화가 통하지 않자 구 의원은 직접 ‘국민신문고’를 통해 지난 10일 민원을 넣었다. 구 의원은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넣을 때 LH가 아닌 국토교통부를 지정해서 민원을 접수했다”고 말하며 “그로부터 일주일 뒤인 17일에 답변이 왔는데, 이상한 점은 국토부에서 LH로 자동 이관되어 답변이 돌아왔다. 결국 구체적인 개선 계획에 대한 답을 듣지 못했다”고 밝혔다.
◇ LH, 신규 아파트는 ‘무장애 설계’ 임대아파트엔 ‘장애 방치’
LH측은 오래된 임대아파트에 대한 주거편의 개선 계획은 현재 세우지 않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새로 설계되는 아파트에는 ‘장애 편의시설’을 대폭 확충할 계획을 세운 것으로 확인돼 형평성에 문제가 있음이 드러났다.
LH는 지난 2011년 4월 19일, 새로 설계되는 아파트에 ‘무장애 1등급’ 수준으로 설계기준을 대폭 상향해 장애인은 물론 일반인도 생활하기 편리한 주거공간으로 업그레이드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장애물 없는 생활환경 인증제도’에서 규정하는 ‘무장애 1등급’ 수준으로 설계기준을 강화한 것이다.
LH측은 당시 “올 하반기부터 설계되는 LH의 모든 공동주택 단지에 ‘무장애 설계기준’을 적용할 것”이라 밝히기도 했다.
주요 설계기준을 살펴보면 먼저 휠체어뿐 아니라 유모차까지 배려해 보행로 폭을 1.5m 이상으로 확대하는 방안이 포함됐다. 또 주민공동시설 주출입구에 자동문을 설치해 편의성을 높이고, 장애인 화장실의 크기 확대와 비데 설치, 엘리베이터 도착 음성 안내 등도 적용하기로 결정했다. 새로 설계되는 아파트에는 충실하게 장애인 주거편의시설을 갖추면서, 기존 아파트는 방치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대해 구 의원은 “영구임대아파트 내 장애인 주거시설 개선 문제는 과거처럼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마인드’의 문제라고 본다”라고 지적하며 “자꾸 예산이 없다고 말은 하지만,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일단 화장실 안전손잡이만이라도 설치해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알아본 결과 5만원 정도면 안전손잡이 하나를 설치할 수 있더라. 이런 작은 것부터 시작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LH나 국토부의 이런 반응은 예산 문제라기보다 ‘귀찮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성토했다.
기자가 접촉한 결과 LH의 반응은 구 의원이 말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LH공사 관계자는 기자와의 대화에서 “우리도 예산이 없는 것을 어쩌냐”는 원론적인 입장만을 반복하며 “국토부 측으로부터 정해진 예산을 받아야 하는데, 올해는 책정된 것이 없는 걸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기자와 함께한 김승기 씨와 구본승 의원은 “너무 무관심한 것 같다”고 아쉬움을 내비쳤다. 김 씨는 “오래된 아파트에 대한 관리는 내버려두면서, 새 아파트만 신경쓰는 게 말이 되냐. 그 아파트들도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방치할 것인가”라며 LH측의 ‘편애’에 일침을 가했다. 구 의원 역시 “이번 일은 정부 차원에서 신경을 써 줘야 한다. 박근혜 정부가 내세운 주요 공약에 ‘복지’도 포함돼 있는데, 장애인 주거시설 개선은 ‘복지’ 중에서도 우선순위에 둬야 할 사항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제33회 장애인의 날’ 행사에서 실무자들을 향해 “정부는 장애인 권익보호 및 편익증진을 주요 국정과제로 추진하고 있다. (정부가)약속한대로 이행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해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번동 임대아파트의 장애인 주민들은 박근혜정부가 ‘약속’만 지키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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