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칼럼]누추할지언정 비루하진 말자

정해용

webmaster@sateconomy.co.kr | 2009-08-03 14:44:03

경제가 어려워진다고 해서 모두가 힘들게 되는 것은 아니다. 11년 전 선진국 진입과 함께 흥청거리던 우리 사회에 갑자기 IMF 금융위기라는 것이 닥쳤을 때를 돌아봐도 그렇다. 기업마다 구조조정에 들어가고 사원들의 상여금 자진반납이며 자발적인 무급휴직, 금 모으기 등등 눈물겨운 일심단결로 이겨내긴 하였지만, 많은 기업이나 개인들이 그 불황의 파고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 길거리로 밀려나 지하도에서 잠자는 노숙자며 끼니마다 사회단체의 무료급식 창구 앞에 줄선 빈민들의 행렬은, 적어도 십수 년래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그런데 그 어려운 시기를 건너고 나자, 예전보다 더 돈이 많아진 사람들이 생겼다. 채무의 무게를 견딜 수 없어 갖고 있던 부동산이며 선박이며 중장비 같은 주요 자산들을 헐값에 팔아치우는 사람들이 있던 반면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것을 사들여 축적하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이다. 헐값에 샀다가 경기회복 후 되팔아 재미를 본 것은 당연한 결과다. 또 다른 부류는 수출기업들이다. 원화가치가 떨어지자 상대적으로 수출가격 대비 국내 생산가는 낮아졌고, 해외시장에서 그만큼의 가격경쟁력을 가지고 톡톡히 재미를 봤다.


그로부터 딱 10년. 미국의 금융위기로부터 시작된 불황의 한파가 바야흐로 온 나라를 휩쓸고 있다. ‘경제 위기’라는 공감대는 많은 사람들에게 당연히 어려움을 감수해야 한다는 명분이 되고 있다. 기업이 마음대로 임직원의 임금을 줄이거나 고용인원을 줄여도 사회는 더 이상 비난하지 않는다. 세계적인 경제위기 아닌가. 노동조합들의 목소리도 한껏 위축돼 있다. 개인들에게는 그런 자리나마 보존할 수 있는 게 다행이기 때문이다.


물론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경제위기가 시작되는 마당에 기업들이 방어적인 경영관리를 시작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특히나 한달 벌어 한달 꾸려가기 바쁜 대다수 중소기업들이 구조조정이나 임금조정 등으로 자구책을 마련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경영자나 고용인이나 힘들기는 매한가지일 것이므로.


문제는 이런 위기를 또 한번의 기회로 삼고자 하는 일부 부자들이나 대기업들의 자세다. 정부는 가뜩이나 어려운 젊은층들의 취업난을 덜어주고자 일자리 창출에 사활을 걸고 있다. 정부나 지자체, 공기업 등에 억지스럽기까지 한 일자리(?)를 만들어 고용의 기회를 늘리고 기업들에게도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그 대가로 인건비 지원을 비롯한 지원책들을 발표하기도 한다. 전경련 등 재계 단체들이 앞장서서 ‘일자리 10% 늘리기’를 선언하자 정부는 이를 믿고 규제완화와 법인세 인하 같은 보상을 약속했다. 노조 단체들까지 나서서 기업의 임금 축소를 양해한다는 합의에 동참했다. 이런 사회적 양해 속에서 대기업들은 재빠르게도 기존 임직원의 임금을 동결하거나 삭감하고 임금이 높은 시니어들에게 당당히 명예퇴직을 종용하고 있다.


그런데 그 다음으로 취할 약속은 얼마나 지켜지고 있는 것일까. 일부 통계들을 보면 대기업들의 고용은 미국發 금융위기가 가시화된 지난해 하반기 이후 거의 늘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줄어든 대기업이 많다고 한다. 경제위기를 구실로 인원을 줄이고 임금을 줄였어도, 과연 지출이 줄어든 만큼을 사회나 사원들을 위해 얼마나 환원하고 있는지가 확연하지 않다. 오히려 다수의 대기업 오너들이 주가가 떨어진 지금 상황을 이용하여 자사 주식을 매입하여 지분 늘리기의 기회로 삼는가 하면, 이 때를 놓칠세라 상속을 위한 주식 이전을 서두르는 오너들도 있다고 한다. 그 뿐일까. 달러 환율을 안정시키겠다고 정부가 보유 외환을 쏟아놓을 때 이를 바닥없는 스펀지처럼 흡수하여 금고 깊숙이 재놓은 ‘사재기’ 세력은 과연 누구였을까. 정부가 경기 활성화를 명분으로 부동산 거래 억제 장치들을 하나하나 풀어주고 있는 지금, 헐값의 부동산을 사들일 수 있는 여력을 가진 사람들은 또 누구일까.


300년 이상 ‘존경받는 富’를 이어온 ‘경주 최 부자’ 댁의 가훈은 유명하다. ‘흉년이 들면 땅을 사지 않는다.’ 많은 기업이나 개인들이 당장 아무것이라도 팔지 않을 수 없게 된 지금 같은 시기야 말로 옛날식으로 치면 희대의 흉년이나 마찬가지일 터이니, 이런 때에 사재기는 하지 않는다는 게 존경받는 부자의 유훈인 셈이다.


우리말에 ‘누추하다’와 ‘비루하다’라는 말이 있다. 의미가 비슷하지만 다르다. 누추하다는 건 가난하거나 어설퍼서 환경이나 외양이 지저분하며 초라함을 일컫는 말이고, 비루하다는 건 외모나 경제조건과 상관없이 성질이 너절하고 더러운 것을 일컫는 말이다. 누추하나 당당한 삶이 있는가 하면 부유하나 비루한 삶이 있다. 국가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시기에 대다수의 희생과 정부의 부양정책을 개인적 치부의 기회로 삼는 기업이나 부자가 있다면, 요컨대 이것이야말로 비루한 처세가 아니고 무엇이라 하겠는가.


[ⓒ 토요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