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열전]커피, 추억의 형식

여선구

webmaster@sateconomy.co.kr | 2009-08-03 11:25:16

사람이 기억할 수 있는 시간의 한계는 얼마나 될까요? 어떤 기억은 뒤돌아서는 순간 까맣게 잊혀 지기도 하고 어떤 기억은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또렷이 살아있기도 합니다. 아마도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고 자꾸만 되살아나는 기억에는 특별한 추억이 깃들어 있을 겁니다. 남들에겐 별다를 것이 없어 보일 돌덩이 하나라도 채색되듯 추억이 스며들면 그 순간 돌덩이는 그냥 돌덩이가 아니라 소중한 이야기가 되듯이 말입니다.


커피에 묻혀 지내다 보니 필자는 커피에 얽힌 기억들이 유난히 많습니다. ‘아, 그때 그 커피......’하며 실타래처럼 추억이 풀려나오지요. 그러고 보니 제게는 커피가 추억을 담는 그릇 같기도 합니다.


2002년의 대한민국은 월드컵 열기로 뜨거웠습니다. 사람들은 붉은 옷을 입고 ‘대한민국’연호하며 박수를 칩니다. 한국 축구 역사상 처음으로 16강에 진출한 뒤에 그 기쁨을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만일 8강에 진출한다면 5000원 하던 아이스라떼를 800원에 팔기로 합니다. 실제로 한국은 8강 진출에 성공했고 기적적으로 4강에까지 진출하자 다시 400원에 팔아야 했죠. 나중엔 결승에 진출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되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대책 없이 밑지는 장사였지만 그 때만큼 신나게 아이스라떼를 만들었던 기억은 다시 없을 겁니다.


또 다른 그 해의 기억이 있습니다. 지리산 청학동의 깊은 골짜기, 허름한 움막 처마 밑에서 한 사람이 원두를 분쇄합니다. 그 옆에선 주전자에서 물이 끓고 있습니다. 산 그림자가 한줄기 바람을 몰고 중턱까지 올라와 한 낮의 더운 공기를 밀어냅니다. 초저녁 하얀 달이 뜬 하늘을 배경으로 천천히 주전자를 들어 원두위에 물을 붓습니다. 커피를 마시면서 굳이 이 높은 산속까지 커피기구를 바리바리 챙겨서 짊어지고 올라온 커피쟁이의 어찌할 수 없는 유난에 입가로 가벼운 웃음이 맺힐 때 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선후보로 출마했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마시고 있던 케냐AA처럼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마음속 깊숙이 묵직하게 자리 잡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뒤로 참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저 한 잔의 맛있는 커피를 위해 땀흘렸던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렇게 평범한 생활인으로 정신없이 살아가는 사이 참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많은 국민들이 그와의 추억을 이야기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대한문 앞에서 조문을 마치고 온 듯 필자의 카페에 와서도 넘치는 슬픔을 주체하지 못해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람이 기억할 수 있는 추억이 얼마나 될까요? 한 사람을 가슴에 묻고서 그저 한 잔의 커피일 뿐이지만 누군가에게 영원히 잊히지 않는 추억을 만들어 보리라 다짐해 봅니다.


[ⓒ 토요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