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통 100주년 파나마 운하, '더욱 거대하게! 더욱 완벽하게!'

독립과 산업 … 운하는 파나마의 정체성

박진호

ck17@sateconomy.co.kr | 2014-09-19 09:00:11

[토요경제=박진호 기자] 대한민국에서 ‘운하’는 애증의 이름이다. 지난 정부가 대형 사업을 벌이겠다는 이름으로 대대적인 정권 인수위원회 당시부터 논란을 만들었고, 이름을 바꾼 사업으로 인해 정권이 바뀐 지금에도 국가에 큰 위기를 가져온 사업이었다는 비난이 끊이지 않고 있다.

사실 ‘운하’는 역사적으로도 성공한 사례가 거의 없는 대형 사업이다. ‘운하’의 성공 모델은 그야말로 규모 자체가 어마 어마한 대륙을 상대로 하는 거래일 때 가능하다는 주장도 있다. 바로 ‘파나마 운하’와 ‘수에즈 운하’가 그 예다. 어쩌면 그 ‘운하’ 하나가 국가 전체라고 할 수 있는 파나마의 ‘파나마 운하’가 지난 달 15일, 개통 100주년을 맞이했다.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를 잇는 파나마 지협에 위치한 파나마는 1903년 콜롬비아로부터 분리 독립한 나라로 우리나라와 1962년에 외교관계를 정식으로 수립하였고, 2007년 기준으로 300여명의 우리 교민이 나가 있다. 사실 이정도 규모라면 파나마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을 법 하지만 대부분의 우리 국민은 파나마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다. 바로 ‘운하’ 때문이다.
대륙을 관통하는 ‘운하’가 존재한다는 사실로 인해 파나마가 어디에 있는지를 대략적으로 유추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로 인해 파나마의 위치가 중미 지역인지 북 아프리카 지역인지 혼동하는 이들은 종종 발견된다. ‘파나마 운하’와 ‘수에즈 운하’를 혼동하는 것이다.
‘운하’가 곧 ‘파나마’다
중앙아메리카에서 동쪽의 콜롬비아와 서쪽의 코스타리카 사이에 길게 늘어서있는 파나마는 남쪽으로 태평양, 북쪽으로는 카리브해와 접하고 있다. 신대륙의 발견으로 유럽의 대항해시대가 이어진 이래로 파나마가 세계사에 등장한 것은 1502년 스페인의 항해사 로드리고 데 바스티다스(Rodrigo de Bastidas)에 의해서였다.
이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는 1502년 제4차 원정 때 파나마에 도착했고, 1519년, 스페인 정부가 페드로 아리아스 다빌라(Pedro Arias Dávila) 총독을 파견하며 파나마를 건설했다. 300년의 세월을 지나 1821년 11월 28일, 파나마는 독립을 이뤘지만 콜롬비아 연방국으로 편입됐고, 1903년 11월 3일에 이르러 콜롬비아로부터 독립하여 ‘파나마 공화국’으로 건국하게 됐다. 그러나 ‘파나마 공화국’의 건설에도 ‘미국의 개입’과 ‘운하’의 역할이 필요했다.
독립도 운하도 1세기가 걸렸다
파나마는 1903년 파나마 운하 조약의 비준을 둘러싼 미국과의 분쟁을 계기로 미국의 지원을 얻어 콜롬비아로부터 분리 독립에 성공했지만, 운하지대에 대한 영구조차권과 치외법권, 그리고 무력간섭권을 미국에 인정하게 됐다.
파나마의 독립 정부의 수립에 절대적인 역할을 했던 운하는 이후 미국 자본의 파나마 유입의 원인 중 하나가 됐고, 이후 파나마에서 운하지대의 주권회복 운동이 일어나며 미국 자본 축출 운동으로 확대되자 미국과의 국교 단절 사태까지 이어지자 운하 수입이 줄어들고 외국 자본 철수로 인해 실업의 증가와 농업생산 후퇴 등의 사회문제가 발생했다.
결국 파나마는 쿠데타와 군사정부의 수립 등 불안한 정세를 이어갔고, 운하는 물론 운하지대에 대한 주권 회복을 목표로 한 교섭을 미국과 벌여 1977년 9월, 새로운 파나마 운하 조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이 조약에 따라 1999년 12월 31일 정오부터 운하와 운하지대에 대한 모든 권리를 미국으로부터 반환받게 됐다.
이것이 파나마 운하다
파나마운하(Canal de Panamá)는 궁극적으로 파나마 지협을 횡단해 태평양과 카리브해를 연결하는데 카리브해와 맞닿은 대서양까지 이어지고 있다.
태평양 연안의 발보아에서 카리브 해 연안의 크리스토발에 이르기까지 총 길이는 64km에 이르는 규모로 지난 1914년 8월 완성됐다. 카리브해로 흘러드는 차그레스강을 막아 축조한 가툰호 안에 34km의 수로가 있으며, 파나마만 쪽의 미라플로레스호 안에 1.6km의 수로가 있고, 두 호수 사이에 만든 쿨레브라 수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파나마운하는 당초 수평식으로 계획되었지만 복잡한 지형으로 인해 가문식으로 건설되었다. 가툰호와 쿨레브라 수로의 수면고도는 25.9m인 반면 미라플로레스호의 수면표고는 16m이다. 이 두 호수 사이의 표고차는 물론 호수와 해면의 표고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파나마 운하는 갑문방식을 이용하고 있다.
태평양쪽에서 진입할 경우 파나마만에서 미라플로레스호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2단식 미라플로레스 갑문, 여기에서 쿨레브라 수로로 통하는 입구에는 1단식의 페드로미겔 갑문, 가툰호에서 카리브만으로 나가는 출구에는 3단식 가툰 갑문이 건설되어 있다. 각각 이중의 항로로 되어있는 세 쌍의 갑문들은 배들이 서로 반대편으로 통과할 수 있게 되어있다.
중앙의 산맥을 횡단할 수 있게 차그레스 강을 막아서 만든 해발 26m의 가툰 호수로 선박을 끌어올린 후 반대편 해면으로 다시 내려놓는 엘리베이터 같은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 파나마 운하의 특징이다. 가툰 호수의 담수는 물의 엘리베이터 역할을 하는데도 소요가 되는데 선박이 갑문을 통과할 때마다 약 1억 9700만 리터의 담수가 사용되고 있다.
연간 평균 이용 선박의 수는 1만 5000척에 이르며 운하를 통과하는 데에는 약 8시간이 걸린다. 1914년 8월 15일 처음으로 개통을 한 운하를 최초로 통과한 선박은 8만 1237톤의 퀸엘리자베스호다.
운하의 미래
파나마 운하는 1529년, 멕시코 정복자로 유명한 스페인의 에르난 코르테스(Hernan Corteś)가 건의했으며, 이를 당시 국왕이었던 카를로스 5세가 계획했지만, 실질적으로는 300여년이 훨씬 지난 1880년대가 되어서야 실행에 옮겨졌다.
처음에는 수에즈 운하를 건설했던 프랑스가 운하 건설을 주도했지만, 지형적 조건의 어려움과 풍토병, 자금 부족 등으로 건설을 위해 설립했던 주식회사가 9년 만에 파산했고, 미국이 파나마의 독립을 지원하며 1903년 이후 뛰어들어 11년 만에 결실을 얻게 된 것이다. 미국은 운하 건설을 위해 철저한 방역대책이 실시하고, 절벽 붕괴사고를 막는 한편, 증기삽과 준설선 등 당시로서는 새로운 토목‧건설 기법을 총동원 했다. 또한 유럽에서 1만 2000명, 서인도 제도에서 3만 1000명 등 방대한 숫자의 노동력을 투입했다.
미국으로부터 운하를 반환받은 후 파나마정부는 파나마 운하청 (acp, autoridad del canal de panama)을 설립하여 운하의 운영, 경영, 보존 및 유지에 신경을 쓰고 있으며, 하부 구조의 지속적인 보수 관리와 현대화에 최근 10년간 무려 15억 달러 이상을 투자했다. 대형 확장 공사도 진행 중이다.
국민투표를 통해 가결되어 지난 2007년 9월부터 시작된 공사는 운하를 확장하고 더 큰 규모의 새로운 갑문을 건설하여, 더 큰 적재량의 선박도 운하를 지날 수 있게 하려 하는 것이다. 이 공사는 태평양과 대서양쪽의 진입로를 더 깊게 만들고 기존의 수로와 가툰 호수를 더 깊고 넓게 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새로 건설하는 갑문들은 427m의 길이와 55m의 폭으로 건설될 예정이며 이는 축구장 4개의 크기와 같다.
2016년 이후 이 공사가 완료되면 약 1만 3000teu 규모의 선박까지 운하를 이용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선박 이용량은 현재의 두 배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물론 운하 확장으로 인한 환경적 문제를 최소화하기 위한 야생 환경의 유지와 보존을 위한 지리학, 생물학, 고고학 환경 영향 연구와 함께 진행되고 있다. 이미 현재에도 ‘파나마 운하’를 방문하면 주변 생태를 설명하는 시설과 당시의 역사를 조명하는
기념관이 자리를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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