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의 두얼굴>부실할 땐 '공기업' 돈 벌때 '사기업'
서민 차별하는 디마케팅 강화... 지나친 우량고객 서비스 경쟁
황지혜
gryffind44@hotmail.com | 2007-03-05 00:00:00
20%의 고객이 80%의 매출을 올려주고, 20%의 핵심 제품이 80%의 수익을 가져다 준다는 20:80 파레토 법칙. 극히 적은 소수가 사회 대부분의 부를 축적하고, 소비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기업들로선 20%를 잡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지기 마련이다.
특히 '프리미엄' 고객의 자본이 절실히 필요한 은행에서는 각종 우대 혜택을 제공하기로 유명하다. 그런 와중에 기본적인 서비스에서도 '찬밥 신세'가 되어버린 서민들은 씁쓸하기만 하다.
"이제 돈 없는 사람은 은행에 돈도 맡기지 말라는 소립니까?"
직장 새내기인 김춘호(26) 씨는 뉴스를 보며 분개했다. 영국계 은행인 HSBC은 갑작스럽게 이번달부터 원화 정기예금의 최저 가입금액을 기존 300만원에서 3000만원으로 무려 10배나 높이기로 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HSBC는 부분 인출이 가능한 자유 정기예금의 최저 가입액도 1000만원에서 3000만원으로 3배 상향 조정했다.
그는 "이제 막 수입이 생기기 시작한터라 목돈을 만들기 위해 2~3년 약정의 은행 정기예금을 들었다"면서 "후에 이 돈으로 증권, 펀드 같은 고수익 상품에 투자해 볼 계획을 세웠는데 이렇게 제한을 높이면 애당초 목돈이 없는 사람들은 어디에 돈을 맡겨야 하느냐"며 반문했다.
HSBC는 이번 상향조치의 배경에 대해 "HSBC 다이렉트 오픈을 통해 고객층별로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됐고, 지점 방문 고객의 창구 대기 시간을 줄이고 충실한 자산관리 상담을 위한 마케팅적 차원"이라고 밝혔다.
이어 HSBC는 "3000만원 이하의 예치금을 가진 고객은 HSBC 다이렉트를 통해 자유롭게 입출금을 할 수 있고, 시중 보통예금보다 높은 이율을 누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HSBC 다이렉트는 최저가입액이 없는 대신 금리가 연 3.5%로 다른 은행들의 수시입출금이 가능한 저축예금에 비해 높은 편이다.
그러나 인터넷이나 폰뱅킹을 통해서만 이용이 가능하고, 현금카드가 지급되지 않기 때문에 저축예금에 들어있는 돈을 현금으로 인출하려면 다른 은행계좌로 이체해 이용해야 하는 등 불편함이 따른다. 즉, 3000만원미만 소액 예금자들은 이런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는 소리다.
이처럼 서민들의 거센 반발을 감수하면서까지 HSBC가 최저가입액을 상향조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업계 관계자들은 이번 상향조치로 HSBC가 소액 고객에 할애하는 시간, 인적 자원을 온라인 전용서비스인 다이렉트뱅킹으로 유도해 최대한 줄이고, 창구에서 거액을 예치하는 '프리미엄' 고객을 전담키로 한, 이른바 디마케팅 전략에 나선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디디마케팅(demarketing)은 기업들이 자사 상품에 대한 고객의 구매를 의도적으로 줄이면서 오히려 적절한 수요를 창출해 내는 수익성 중심의 전략으로, 많은 기업들이 은밀하게 추진하는 마케팅 전략이다.
이 마케팅에 신중을 기하는 것은 자칫 기업이 고객을 내쫒는 모습으로 비춰질 경우, 고객들로부터 비난을 면하기 어렵고 잠재 고객마저 잃을 수 있는 위험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경우, 디마케팅의 정도가 지나치다는 데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은행권에 따르면 보통 시중은행의 정기예금 가입액 한도가 100만원대에 수준임을 감안할 때 HSBC의 이번 조치는 파격적이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같은 업계에 있지만 은행의 공익성은 무시한 채 은행 수익에 큰 도움이 안 되는 고객은 시중은행으로 떠넘기고, 자신들은 돈 되는 고객만 챙기겠다는 오만한 처사"라며 비판했다.
그러나 그간 디마케팅(demarketing)을 대대적으로 벌여왔던 은행권의 전례를 되짚어보면, 정도에 지나친 처사는 이번만이 아니다.
일찍이 '효율성'을 강조, 공과금 자동 납부기를 개발해 공과금 내러오는 고객을 창구로부터 차단하고, 단순이체나 출금 등의 고객도 자동화기기로 내몰았던 것도 바로 디마케팅 전략의 일환이다. 이 바람에 앉아서 차례를 기다리던 소파는 등받이 없는 의자로 교체되기도 했다.
초기 신용도가 부실한 고객을 정리하는데 그쳤던 디마케팅이 최근에는 은행에 손실을 끼치는 ‘불량고객’과 수익에 기여하는 ‘우량고객’으로 분류해, 우량고객을 중심으로 차별화된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전개되면서 일반인들과 우량고객간의 서비스 차이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우량고객이 대출을 받을 때는 일반인들로서는 '그림의 떡'인 각종 혜택이 제공된다. 지난해 은행들은 신용도가 높은 고객에 주목하면서 의사, 법조인, 공인회계사, 세무사 등의 전문직 종사자를 겨냥한 저금리 대출 상품을 줄줄이 선보였다.
변리사, 회계사, 관세사, 법무사 등 전문자격증 소유자를 대상으로 한 우리은행의 ‘우리 전문직 클럽 신용대출'은 최고 3억원의 여유있는 대출한도를 적용하며, 플래티늄카드 연회비, 송금 수수료 및 자동화기기 이용수수료 면제에 환율 우대 등 부가서비스를 제공한다.
하나은행 ‘패밀리론’도 은행에서 지정한 3000여 개의 우량 업체 임직원을 대상으로 한 상품으로, 대출자가 급여계좌로 이체를 신청할 경우에 대출한도가 500만∼1000만원 더 늘어나고 대출기간 중 인터넷뱅킹, 폰뱅킹 등 각종 전자금융 수수료가 면제된다.
부가 혜택뿐 아니라 금리, 한도 차이도 크다. 한국씨티은행 '직장인 신용대출'의 경우, 금리 16.85%에 만기 5년까지 6000만원 대출인 반면 의사자격증을 가진 인턴과 개원 예정의 등을 대상으로 한 '닥터론'은 5.5~7.85% 금리로 3억5000만원까지 대출이 가능하다.
예금을 할 때에도 고액 자산관리자는 국민은행 골드앤와이즈(Gold & Wise), 신한은행 프라이빗뱅크, 하나은행 PB센터(PB) 등 프라이빗뱅킹를 이용한다. 부유층 자산가의 구미에 맞는 특화 상품을 준비돼 있고, 각종 재테크 정보를 제공한다.
최근 우리은행은 '명품관'으로 재탄생한 서울 신세계백화점 본점에 여성전문 PB센터인 ‘투체어스 신세계 PB센터’를 오픈했다. 여성 CEO와 전문직 여성을 대상으로 한 PB센터 개점도 눈여겨 볼 점이지만 애당초 명품이 즐비한 백화점의 우수고객을 타겟으로 증여와 상속 관련 세무, 부동산 상담 등 자산관리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는 검증된 우량고객을 확보하겠다는 의도가 깔려있다. 앞서 박성목 우리은행 부행장은 “우량고객 유치 경쟁에서 뒤쳐지는 은행은 수년 내 선도 은행 경쟁에서 탈락해 인수합병 당하거나 혹독한 구조조정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며 우량고객 유치 경쟁에 대한 절박함을 전한 바 있다.
그러나 은행들의 디마케팅 열기가 뜨거워질수록 서민들의 불만도 쌓이고 있다. 주부 이성미 씨(37)는 "은행 입장에서 부자 고객은 큰 수익원이기 때문에 그만큼 대접 해주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면서 "그러나 한쪽에만 지나칠 정도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같아 상대적으로 홀대받는 느낌"이라며 씁쓸해 했다.
일각에서는 공공성이 중시되는 은행이 자신의 편의대로 공익성과 수익성을 이용하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업계 관계자는 "국가에서 갖은 특혜를 받으면서 영업을 하고 있는 은행이 공익성은 팽개치고 수익성 증대에만 집착하는 것은 문제"라면서 "은행들은 과거 경쟁력 없는 부실기업에 돈을 몰아주다가 부도가 난 부채를 누가 막아줬는지 상기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외환위기 당시, 중소기업 전담 은행이나 지역 은행은 대부분 문을 닫았다. 이때 몇몇 시중은행들은 '세금 먹는 하마'라는 별명까지 얻으면서, 정부로부터 부실 금융기관으로 지정돼 막대한 '공적자금'으로 긴급수혈을 받았다.
당시 은행이 내세운 논리는 '공공성'이였다. 은행에 공적자금을 투입되지 않으면 기업, 가계 도산으로 이어져 국가 경제의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과 금융기관이 돈이라는 국가 경제의 피를 관리하는 곳이기에 평소 정부의 규제가 강한 것도 은행을 공기업으로 인식하게 했다.
결국 은행의 부실을 막기 위해 공적자금이 투입되고, 공적자금으로 부실자산을 메운 은행들은 현재 금융지주로 성장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위기 이후 지금까지 출혈적인 서비스를 하면서까지 시장경쟁에 참여하고 있지만 워낙 경쟁이 치열해 남는 게 거의 없다"면서 "은행도 영업 최일선에서 생존을 위해 마케팅 전략을 구사할 필요가 있는데 어느 정도 인정해 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소연했다.
그러나 지난해 시중은행 대부분이 주택대출 영업경쟁, 우량 중소기업 대출 등의 영업 전략으로 사상 최대 순수익을 기록했다. 반면 은행들의 영업대전 속에 시중의 유동성이 과도하게 넘쳐나고, 이 돈이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가 집값 폭등을 부채질한다는 문제가 제기되자 정부가 뒤늦게 대출 규제에 나섰다.
국민에게 보여야 할 공익성은 도외시 된 채 수익성만을 쫒는 은행의 단적인 모습이다. 유지창 은행연합회장은 "은행의 공익추구는 결국 수익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에 공익과 수익 추구는 결국 하나”라면서
"은행들이 지금보다 능동적으로 금융 소외부분을 찾아 지원하고, 국가경제에 대해 기여도를 높이는 등 공익성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며 강조했다.
한편 고객들에게 상향 배경에 대한 제대로 정보조차 제공하지 않은 HSBC의 자세도 문제로 지적됐다. 은행측은 지난달 8일 홈페이지에 처음으로 사실을 공지할 당시에도 배경에 대한 언급은 단 한 줄도 없이 상향관련 사실만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그러다 언론의 비판이 거세지자 지난달 28일에서야 성명서를 배포하고, 홈페이지에는 은근슬쩍 상향 배경을 담은 글로 업데이트 했다. 이에 대해 은행 관계자는 "고객의 이해를 구하는 부분이 부족했다는 점은 인정한다"고 시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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