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지폐 도안 '도마위'
1만원권 뒷면 '혼천의' 논란 이어 천원권 '외래산 수박' 도안 지적
장해리
healee81@naver.com | 2007-02-05 00:00:00
새 화폐 도안을 둘러싸고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1만원권 뒷면의 '혼천의' 논란에 이어 앞면 '일월오봉도'가 세종대왕 때의 작품이 아닌 것으로 지적되면서 1000원권 뒷면의 '계상정거도'와 외래산 수박 도안이 부적절하다는 5000원권까지 신권 3종의 도안이 모두 도마에 오르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은행이 역사적 사실과 문화재에 대한 고증을 거치지 않아 우리 문화의 상징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지난 22일 발행된 1만원 신권 뒷면의 도안인 ‘혼천의’가 먼저 화두에 올랐다.
1만원 신권 앞면에는 세종대왕 초상화와 일월오봉도, 뒷면에는 천상열차분야지도와 보현산 1.8m 망원경, 혼천의 등의 도안이 들어가 있다.
문제가 된 ‘혼천의’는 우리나라의 독창적 과학창조물인 혼천시계(국보 230호)의 일부 부속품이며 중국에서 유래된 천문관측기구로서, 역사학자들은 “혼천시계 전체를 사용해야 한다”며 “우리 지폐에 쓰이기에 곤란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한국은행 측은 “혼천시계의 박스형 디자인이 화폐에 어울리지 않아 보조 소재로 혼천의를 넣게 됐다”고 해명했다. 과학적, 역사적 의미를 무시하고 도안상의 편의만 고려한 것이다.이와 함께 혼천의와 함께 들어가 있는 보현산망원경도 우리나라의 과학을 알리기에 부족하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한 천문학자는 “직경 1.8m의 만원경은 세계 50위권에도 들지 못하는 작은 크기”라며 지폐 도안으로 사용되기에 창피할 정도라고 말했다. 또한 1만원권 앞면에 실린 ‘일월오봉도’가 세종대왕 때가 아닌 조선후기 작품이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한국은행은 “세종대왕의 뒷배경으로 조선시대 궁중행사에 사용했던 일월오봉도 병풍을 깔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일월오봉도는 세종 때가 아닌 17~18세기인 조선 후기때부터 사용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고 반박했다.
‘조선시대 어진관계 도감의궤 연구(이성미 저)’에 따르면 일월오봉도는 1688년에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1만원 신권에 이어 이미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새 5000원권의 도안도 우리나라의 문화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지난해 1월부터 발행된 5000원 신권은 앞면에 율곡 이이, 뒷면에 신사임당의 ‘초충도’를 담았다. 한국은행은 당시 “신사임당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8폭 초충도 그림에서 수박과 맨드라미를 도안화해 사용했다”고 밝혔다.
이에 이형구 선문대 고고학 교수는 “도안에 사용된 수박은 아프리카 열대가 원산지로 우리나라에 언제 유래됐는지 불분명하다”며 “중국에서도 수박은 서쪽에서 온 오이라고 부르는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화폐에 쓰이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말했다.
학계는 신사임당의 초충도 중 방아깨비나 개구리 등 우리나라 자연에서 서식하는 것들을 소재로 삼는 것이 더 낫다고 지적했다. 1000원 신권에 실린 겸재 정선의 그림 ‘계상정거도’도 도마에 올랐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1월 지폐 도안 확정 과정에서 1000원권 뒷면에 실린 그림의 장소가 ‘도산서당’이라고 했다가, 지난 22일 지폐를 발행하면서 별다른 설명 없이 그림 속의 모습이 ‘계상서당’이라고 말을 바꿨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도안을 결정할 당시 그림의 장소가 도산서원의 전신인 도산서당으로 알고 있었다”며 “이후 인터넷에 올라온 글을 보고 연대가 맞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겸재의 그림이 실린 서첩에 ‘그림 속의 퇴계가 주자서절요를 집필하는 모습’이라고 소개돼있는데 집필 당시는 도산서당이 지어지기 전이라는 것이라는 네티즌의 글을 보고 구체적인 고증작업 없이 말을 바꾼 것이다.
퇴계 문중의 관계자와 계상서당 복원에 참여했던 건축가 김경호씨는 “퇴계의 주자서절요 집필 연대로 보면 계상서당이 맞지만, 겸재가 퇴계 사후 170여년 이후에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과 그림 속의 지형을 감안해보면 도산서당을 모델로 삼은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도산서원 관리사무소에서 그림의 장소가 ‘도산서당’이 맞다며 공식 입장을 표명했다.
그림 속 지형의 위치와 당시 계상서원은 초가집으로 지어져 비가 샜다는 기록도 있고 도산서원은 신권 도안처럼 기와집으로 지어졌다는 등의 근거를 들어 도산서원이 맞다고 밝혔다.
이 같이 새 화폐 도안을 둘러싼 논란은 한국은행이 여론 수렴 과정을 제대로 밟지 않았다는 비판으로 이어지고 있다. 5000원 신권의 경우 지난 2005년 11월 언론에 도안을 공개한 후 2개월 뒤인 2006년 1월에 신권을 발행해 여론 수렴할 기간이 너무 짧았고, 관련 학자들이 외래종 수박을 지적하는 자료를 보낼 적당한 통로도 없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문중양 서울대 국사학 교수는 “1만원권 도안의 경우도 뒷면 도안에 혼천시계가 들어간다고 듣기만 했을 뿐 도안을 직접 본 것은 발행 직전인 올해 1월 중순이었다”고 밝혔다.
또한 화폐 도안 자문위에 디자인과 색채 등 미술계 관련 인사들만 포함됐을 뿐 과학사 전공 학자들이나 문화재 관련 인사들이 포함되지 않아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재가 제대로 검증되지 않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한국은행은 “지폐에 따라 테마가 달라 처음부터 이 모든 사람을 다 포함할 수 없다”며 “해당 사항이 생기면 따로 자문을 구하고 자문료를 주는 식으로 운영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문화연대는 “자문위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주제는 소위원회를 두고 과학사 학자의 의견을 청취하는 등 탄력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문위는 2005년 4월부터 10월까지 6개월 동안 회의를 11번했으나, 2005년 11월 5000원 신권 도안이 공개된 뒤에는 한 번도 자문위를 열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여론 수렴 과정이 얼마나 미비했는지 보여주고 있다.
윤한근 한국은행 부총재보는 “향후 새 지폐를 발행할 때 도안을 공고한 뒤 전문가와 일반 국민들이 이의제기를 할 수 있는 일정기간을 설정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라며 “도안자문위 등에서 문제제기를 철저히 검증한 후 수정할 것을 수정하고 부당한 문제제기를 충분히 설명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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