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남대로를 따라가는 정약용 남도유배길
토요경제
webmaster@sateconomy.com | 2010-04-05 10:21:04
남도유배길은 강진군에서 영암군에 걸쳐 만들어진 61km의 이야기 길이다. 42km는 다산유배지인 강진에, 19km는 그 너머 영암에 자리한다. 과거의 유적이 많아 둘러볼 곳 많은 길이며, 그만큼 얽힌 이야기도 많은 곳이다. 때 묻지 않은 자연 덕분에 최근 웰빙 바람을 타고 많은 여행자들이 찾는다.
탐진(耽津). 강진을 이르는 옛 이름은 탐라. 즉 제주로 가는 나루를 뜻한다. 이곳은 제주 혹은 각지의 섬으로 오가던 배들이 수시로 드나들던 길목이었다. 한 마디로 한양에서 제일 먼 육지의 끝이자, 멀고 먼 바다의 시작. 200년 전 다산 정약용은 이것으로 유배를 왔다. 그리고 강진 사람들의 온정 덕분에 그의 유배기간은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나라 실학이 발전하는 최상의 시간이 되기도 했다. 유홍준은 강진을 ‘남도답사 1번지’라고 아낌없이 추어올렸다. 남도 답사 1번지. 동백꽃이 절로 지고, 철새가 당연한 듯 날아드는 모습은 말 그대로 옛 시구 한편이다. 강진에서 영암으로 걷는 길은 오랜 이야기를 만나는 시간이다.
다산과 혜장스님, 산책하며 학문적 교감 나누던 길
다산수련원에서 시작한 발걸음은 대숲이 우거진 오솔길을 따라 다산 초당을 향해 간다. 다산초당은 다산이 그의 학문과 사상을 집대성한 곳. 정조가 죽은 후, 한양에서는 혼란스러운 날들이 계속 되었다. 신유박해와 황사영 백거사건으로 경상도 기장에서 유배 중이던 다산은 한양으로 불려가 갖은 고초에 시달린다. 다산의 큰 형이 죽고 다산은 강진으로, 둘째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를 간다. 강진에 온 다산은 주막집 제자의 집을 전전하다 외갓집 사람들이 써왔던 다산초당으로 옮겨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른다. 잠시 마루턱에 걸터앉아 마루를 쓸어 보면 그가 손수 만들었을 공간 속에서 그의 삶이 오롯이 느껴진다. 다산이 제자들과 손수 꾸민 축대와 뒷산은 마찬가지로 직접 심은 마무들로 울창하다. 아늑하게 들어앉은 건물들을 지나 구강포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자리한 천일각에 오른다. 이곳에서 다산은 오매불망 흑산도로 유배 간 형을 그리워하며 오가는 배들을 바라봤을 것이다. 마재에 두고 온 가족들과 한때 정조의 곁에서 나랏일을 돕던 한양에서의 기억도 떠올랐을 것이다.
천일각을 뒤로하고 이어지는 좁은 산길을 따라 백련사에 이르는 길. 20분 정도 걸리는 이 산길은 산 너머 살았던 젊고 총명한 승려 혜장과 다산을 친구처럼 이어주던 길이며 사이였다. 고개 하나를 넘자 울창한 동백숲이다. 이른 봄이면 떨어진 꽃잎에 바닥까지 붉게 물든다는 이곳 동백숲은 천연 기념물로 지정될 만큼 아름답다. 특히 호수 같은 구강포와 천관산의 풍광이 더해져 여행자들의 탄성이 여기저기서 들릴 정도이다. 남포마을을 지나 시골장의 정겨움을 느낄 수 있는 강진 읍내로 들어선다. 장터국밥, 보리밥, 누른 머리고기, 된장물회 같은 토속적인 음식과 어제도 본 사람인 냥 살갑게 대해주는 시장 사람들 사이에서 걸음을 멈추고 허기를 달랜다. 강진 5일장에서 쉬다 나오니 길은 50년 전 풍경으로 접어든다. 여인숙이며 구멍가게가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어 시간을 건너온 듯하다. 이 길 끝에 사의재가 있다. 강진으로 유배를 온 다산이 처음으로 여장을 푼 곳, 누구도 권력자 눈 밖에 난 다산을 가까이 하려 하지 않았다. 그때 다산을 거둔 것이 주막집의 주모였다. 늙은 주모는 한양을 떠나 땅 설고 물 선 강진 땅에서 다산에게 처음으로 의지할 곳을 내어준 사람이다. 다산은 이곳에서 안정을 찾고 몸과 마음가짐을 단정히 하려는 네 가지 뜻을 세운다는 의미에서 자신이 머물던 방에 ‘사의재’라 이름 붙였다. 다산에게 따스한 마음을 주었던 주모가 불을 지폈을 아궁이 앞에 앉아 한 잔 술로 목을 축여본다.
영랑이 기다렸을 모란이 여기에
사의재에서 나와 작은 탱자울타리 소담한 골목길을 걷다 보면 금서당이라는 건물과 마주하게 된다. 금서당은 조선시대에는 학동들을 가르치는 서당으로, 일제 강점기에는 소학교로 쓰이던 곳. 한쪽은 팔작지붕 한옥이 한쪽은 슬라브 지붕의 양옥이 자리한다. 영랑도 이 학교를 다니며 항일운동을 펼쳤다고 하니 그 깊은 역사가 느껴진다. 지금은 향토화가의 아틀리에로 쓰이며 차도 한 잔 할 수 있는 예술 공간으로 바뀌었다. 바로 아래에 영랑생가가 있다. 사적지가 된 영랑의 집은 영랑이 살았던 당시에는 근동에서 알아줬던 부잣집이었다. 문간채와 안채, 사랑채까지 잘 갖춰진 이곳에는 영랑의 흔적이 곳곳에 스며있다. 영랑이 보며 시상을 떠올렸을 돌담과 장독대, 우물, 모란을 비롯한 남도 특유의 꽃나무들, 아늑하면서도 창연한 집의 구조는 여행자의 발길을 오랫동안 잡는다. 자리마다 놓은 시비에는 영랑의 시들이 빼곡하다. 영랑의 시들을 하나씩 읊으며 이곳을 둘러보고 대청에 앉아 영랑의 시선이 되어본다. 영랑의 생가를 나와 집 뒤쪽에 있는 산길에 접어든다. 이 길가에는 영랑의 친척으로 같은 시기에 함께 시를 썼던 김현구 시인의 자취가 남아있다.
산길을 지나 소나무 사이로 난 길은 저수지를 지나 논 사이로 이어진다. 쉬어갈까 싶을 때쯤 송학마을이 모습을 드러낸다. 소나무가 많은 산, 그 아래 학이 날개를 쉬어가는 듯한 형상이라 송학마을이라 부른다. 마을에 고즈넉한 정자들이 있어 여행자의 발을 쉬게 한다. 논 가운데로 난 작은 고개를 넘어가니 금당마을 백련지이다. 백련이 피는 7월이면 그 모습이 그윽하다. 크고 향기가 진해 독립기념관까지 분양해줬을 정도라고. 목포에서 부산으로 길게 이어지는 2번 국도를 따라 자박자박 걷는다. 자귀나무가 걸음마다 그늘을 드리운다. 성전 면소재지를 지나 작은 학교,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는 도라지꽃과 앵초꽃이 흐드러진 길 위로 이어진다. 성전달마지마을이다. 산 아래 옹기종기 모인 작은 시골마을. 예부터 학이 날개를 펼치고 있는 형상으로 집들이 모여 살았다는데, 살고 있는 학의 부위에 따라 사람들의 운명이 정해졌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학의 머리 부분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는 학자가 많고 배 근처에서 태어난 사람은 부자로 사는 경우가 많았단다. 집 위치를 따져보며 마을 길을 걸으니 이쯤 살았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생긴다.
그리움 짙은 녹색향기 길
마을을 지나 목장 길을 걷다 보니 월출산 무위사이다. 미술사가 유홍준이 ‘나의 문화유산답사지’에서 ‘이처럼 소담하고, 한적하고, 검소하고, 질박한 아름다움도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라곤 한다’고 말했던 그곳이다.
해탈문을 지나자 늘어진 배롱나무가 묘한 풍치를 자아낸다. 평탄한 경내에는 화려한 단청없이 나무의 결을 그대로 살려 지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국보 제13호인 극락보전, 극락보전 후불탱화인 백의관음도 등의 유물들이 소박한 사찰에 멋을 더한다. 무위사를 나의 왼쪽으로 산 아래를 돌아가면 월출산 제일경이라 해서 다산이 초의선사 등의 지인들과 자주 찾았던 안운마을, 백운동이다. 월출산의 맑은 물이 구름으로 피어오른다 하여 백운동이라 불리었다더니, 깊은 골짜기와 동백꽃이 어우러질 무렵이면 운치가 기가 막히다. 가까이에는 넓게 펼쳐진 차밭이 있다. 강진다원(태평양녹차밭)이다. 몽글몽글한 차나무가 산 아래부터 펼쳐져 끝을 모른다. 이곳에서 얼마 못가 마을 안에서 월남사지를 마주한다. 한때 호남불교를 이끌던 큰 사찰이었지만 지금은 창건주 진각국사 혜심의 추모비만이 어렴풋한 글자를 간직한 채 남아있다. 바로 곁엔 백제 시대 탑의 형식을 따라 만들어진 월남사지3층석탑이 있다. 천왕봉을 마주 올려다보는 준수한 탑신과 주변의 돌담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는 이길 위에서만 마주할 수 있는 크나큰 선물이다.
‘월출산 자락 기(氣) 충전길’
사자봉 아래 있다 하여 한때 사자사로 불렸다는 천황사는 월출산 동남사면에 있었던 큰 절이었는데 아쉽게도 몇 해 전 큰 불이 나 대부분의 건축물들이 소실되고 말았다. 현재는 대각국사 의천을 종조로 모시는 법화종의 사찰로 옛 모습을 복원하기 위해 노력중이다. 월출산에 있는 바위의 80%가 맥반석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니 산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건강해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평소 같으면 쉬자고 졸라댔을 다리도 군소리 없이 움직인다. 이곳에서 성풍사지 5층 석탑을 지나 기찬랜드에 닿을 때까지 명품 트래킹 코스가 이어진다. 월출산기찬랜드는 입구부터 사람들로 붐빈다. 삼림욕장도 있고 기 건강센터도 있어 웰빙족들에게 인기란다. 여름에는 월출산 맥반석 사이로 흘러나온 계곡물을 막아 만든 천연 풀장이 기다리고 있으니, 아이들과 함께 기찬묏길을 걸어 올라와 지친 몸을 달래기에 그만이다.
도갑사를 지나 구서면 소재지로 들어서면 왕인박사유적지가 나타난다. 백제시대 때 바다 건너 일본에 학문과 문화를 전했던 왕인박사. 해마다 이곳에서 열리는 왕인박사축제에 일본사람들이 찾는 이유이다. 곳곳에 왕인박사의 탄생지부터 사당, 공부하던 곳, 마시던 샘 등이 복원되어 있는데, 복원된 유적마다 옛 이야기가 적힌 팻말이 눈길을 끈다.
유적지 앞이 구림마을 안에는 고택들과 그보다 더 오래되었을 소나무, 사우와 정자들을 비롯한 건물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 돌담을 따라 구석구석, 어딜 가도 남도 사람들의 오랜 삶의 정취가 물씬 느껴진다. 그 중 사람들이 가장 붐비는 곳이 바로 고죽 최경창의 집이다. 조선 8대 문장가로 손꼽히는 최경창이 출세 전까지 20년을 살아온 곳, 이곳에는 최경창과 그를 연모한 기생 홍랑의 사랑이 전해진다. 서로가 주고 받은 연시가 비석으로 세워져 그 절절한 마음이 400년이 지난 지금도 느껴진다. 아직 그의 집에는 해주 최씨 후손들이 살고 있어 지나는 이들은 목소리를 낮춰 시를 따라 읊곤 한다.
빽빽한 건물로 가득 찬 도심 속에서 정신없는 일상에 지쳐있다면, 시 한편, 소설 한 구절 읽을 짬조차 내기 어렵다고 불평하고 있다면 남도유배길에서 여유를 찾아보는 건 어떨까? 지친 걸음으로 유배를 떠나야 했던 정약용 선생의 고행길을 따라 사색의 시간에 잠길 수 있을 것이다. 고행의 끝에는 달콤한 휴식이 있는 법. 길속에 숨겨진 다산의 이야기를 듣고, 차 한 잔 곁들이며 영랑의 시 속에 푹 빠져보고···. 마지막으로 웰빙문화체험으로 기를 한껏 담아 올 수 있을 것이다.
[ⓒ 토요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